원어 항목명 | 保坂浩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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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保坂浩明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9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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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66년 |
원어 항목명 | 保坂浩明 |
성별 | 남 |
1915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뒤 노동 운동을 펼친 재일 조선인 노동 운동가.
호사카 히로아키는 1915년 평안남도 개천읍에서 태어났고 한글 이름은 이호명(李浩明)이다. 1929년 우수한 학업 성적을 인정받아 보통학교 교장의 특별 주선을 통해 일본인들이 통학하는 평양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1934년 제1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38년 4월 일본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입학하였다. 대학 입학 후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을 탐독하였고 1938년 6월경 이후 이토 리쓰[伊藤律], 이시무라 우메조[石村梅三] 등과 일본 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1940년 6월 29일 검거되어 12월 12일 송국(送局)되었다. 1941년 3월 1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43년 항소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941년 11월 호사카 노리요[保阪典代]와 결혼하며 부인의 성을 따라 호사카가 되었다. 전후(戰後)에는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 도호쿠[東北] 지방 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노동 운동 재건에 힘을 쏟았다. 게이세이 전철[京成電鐵]의 생산 관리 투쟁, 경찰 탄압에 항의하며 탄광 노동자 등이 일으킨 다이라 사건[平事件] 등을 지도하다가 1951년 9월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호사카 히로아키는 1966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