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禹長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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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長春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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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59년 8월 9일 |
몰년 시기/일시 | 1959년 |
원어 항목명 | 禹長春 |
성격 | 남 |
1950년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 근대 농업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식물학자이자 농학자.
우장춘은 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로 불리며 한국 근대 농업 발전에 크게 공헌한 식물학자이자 농학자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하며 1896년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禹範善)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仲] 사이에서 1898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농학부를 졸업하고 농림성에서 기수(技手)로 근무하였다. 서양 유채와 일본 유채를 합성하여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는 유채의 품종 개량 연구에 몰두하여,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최초로 농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배추속 작물의 게놈을 분석한 우장춘의 박사 논문 「종의 합성론」은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적자생존설을 수정 및 보충한 것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농림성 시절에는 기사(技師)조차 되지 못하고 계속 기수에 머물렀다.
전후(戰後) 자작농으로 지내던 중 한국에서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1950년 귀국하였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의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품종의 연구 및 개발하고 연구자 육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제주도의 감귤류 재배도 직접 지도하였다. 1958년 농업원 초대 원예시험장장이 되었고, 1959년 8월 10일 위십이지장궤양으로 사망하였다.
우장춘의 묘소는 경기도 수원시에 소재한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 기슭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