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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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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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97년 4월 22일 |
성격 | 통일 운동가 |
성별 | 남 |
195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민족시보』 주필로 활동한 재일 한인 통일 운동가.
송인호는 1932년 한국에서 출생하였다. 중학교 2학년 때 학생 운동을 지도하다가 퇴학당하였고, 20대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정착한 후 송인호는 막노동으로 생활하였다. 민족 해방과 조국 통일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독학으로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한 후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4년 4월 재일 동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귀국을 포기하고 이후 16년 동안 재일동포 조작간첩구원운동을 전개하였다. 구원운동론으로 개별적 운동에서 정치범 가족들의 연대 운동, 탄원 운동에서 석방쟁취투쟁, 인권 운동 차원에서 민주화 통일 운동 일환으로 전개할 것을 제시하였다. 구원 운동을 위해 재일 한인과 일본 시민에 대한 홍보 활동과 대리 정부 교섭, 유엔인권소위원회 및 국제사면위원회 등 국제 인권 기관을 통한 세계적 여론화와 한국 정부에 대한 압력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도 정치범 사건 진상을 폭로하는 기록 영화 「고발」을 제작하여 일본 200여 곳에서 상영하였다. 이를 계기로 구원 운동으로서의 한일 연대 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1982년 3월 재일 한인 5명의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재일 한인 정치범을 석방시켰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매진하였다.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의 기관지 『민족시보』 주필로 취임하여 재일 한인 사회에 자주 민주 통일의 의식화, 조직화하는 데 『민족시보』를 강화, 발전시켰다. 송인호는 1997년 4월 22일 사망하였다. 부인 김지영이 이어 『민족시보』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2003년 9월 19일 영정 사진으로 부인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