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朴広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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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廣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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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82년 12월 4일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함흥 |
원어 항목명 | 朴広海 |
성격 | 노동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일본 아이치현, 시가현 등에서 활동한 재일 한인 노동 운동가.
박광해는 1920년 일본에 건너가 1922년 김천해(金天海)를 만나 노동 운동을 하면서 일본 각지의 조선인 노동 현장을 조사하였다. 이후 1년간 러시아 극동 지방에서 지내다 1924년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25년 2월 재일조선노동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가나가와[神奈川] 조선노동조합, 도야마[富山] 조선노동조합의 간부를 거쳐 1928년경 니가타[新潟] 조선노동조합의 간부가 되어 각종 경제 투쟁을 지도하였다. 1930년 8월 아이치현[愛知縣]의 산신[三信]철도쟁의 때 니가타 조선노동조합에서 파견되어 쟁의를 지원하였다. 산신철도쟁의로 징역 1년형을 받았으며, 1931년 말 출옥 후에도 계속 아이치현에 머물며 일본 공산당 청년동맹 재건 운동,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 산하의 토건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 일본인을 포함하는 나고야[名古屋] 합동 노동조합을 조직해 활동하였고, 아이치현의 이웃 현인 기후현[岐阜縣]의 융화 단체 정화회(正和會)를 통해 한글 야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탄압을 받아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다시 투옥되었다.
해방 후 재일조선인연맹[조련] 시가현[滋賀縣] 지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49년 재일조선인연맹 강제 해산 후에는 후계 조직인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의 의장단 일원을 맡았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발족 후에는 중앙의장단, 중앙학원장, 감찰위원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