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宋性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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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性澈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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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宋性澈 |
성격 | 사회주의 운동가 |
성별 | 남 |
1914년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사회주의 운동가.
송성철은 1914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1923년부터 제주도와 오사카 정기 직항선이 운항을 시작하면서 제주도민들 가운데 오사카로 이주하여 노동 운동을 벌인 인물이 많았다. 재일 제주인 가운데는 일본 내의 조선노동조합총동맹을 비롯하여 일본 공산당 및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 등의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이 많았다. 송성철은 재일 조선인 사회주의 운동가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혁우동맹(革友同盟)에 참가하고 있던 강창보(姜昌輔)는 1931년 5월 15일 김원희의 결혼식에 참가한 모임에서 제주도 사회주의자들의 항일 운동 조직인 제주도 야체이카[세포 조직]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제주도 야체이카 결성을 계기로 전국적인 조선 공산당 재건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의 일환으로 1931년 6월 13일 송성철의 건의로 제주읍에서 개최되는 제주도 자전거 대회를 이용하여 각 지역의 운동가들이 모여 제주도 소년운동지도자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제주도 소년운동지도자 간담회에서는 소년의 교양 문제, 체육 문제, 부인 문제, 농민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이후 송성철은 193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공산당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간부로서 오사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에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송성철은 1935년 『조선신문』 창간에 관여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9월 편집국장 이운수(李雲洙) 등과 함께 신문의 논조가 민족적이라는 이유로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직후 공산당의 활동이 합법화되면서 일본 공산당은 재건되었다. 이후 1945년 12월 1일부터 3일까지 도쿄의 일본 공산당 본부에서 일본 공산당 제4차 대회가 개최되었다. 일본 공산당 제4차 대회에서 김천해(金天海)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일본 공산당 중앙에 조선인부가 설치되자 송성철은 간토[関東] 지방 담당 부원이 되었다. 이후 1946년 2월 일본 공산당 제5회 대회에서는 송성철, 김두용(金斗鎔), 박은철(朴恩哲), 이호명(李浩明)이 중앙위원 후보에 올랐다. 송성철은 전후 일본에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설립에도 상당히 많이 관여하였으며, 1946년 11월 결성된 조선인생활권옹호위원회 대표 위원이 되어 12월 진행된 조선인 생활권옹호 전국대회에서 검거되어 1947년 3월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었다고 하는데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1948년 4월 14일부터 26일까지 전개된 한신 교육투쟁의 과정에서 재일본조선인연맹 소속의 송성철(宋性澈)이 투쟁을 지도하였다고 하는데 송성철(宋性徹)과 송성철(宋性澈) 두 사람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강제 송환 시점으로 본다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거나 일본 공산당과 재일본조선인연맹에서 활동한 송성철이란 인물이 한자만 다른 동명이인이란 사실이 명확하게 논증되지 않는 한 여전히 의문점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