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경

원어 항목명 金漢卿
한자 金漢卿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출생지 대한민국 충청북도 제천군
원어 항목명 金漢卿
성별
정의

1920년부터 1930년대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전향한 친일 언론인.

개설

김한경은 1902년 충청북도 제천군(提川郡)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별명으로 김균(金均), 남만권(南萬權), 조근(趙槿) 등을 사용하였다.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은 가네모토 겐지[金本憲治]이다. 1920년대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조직에 속하여 활동하였으나 1938년 이후 친일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등에 참여하여 내선일체와 전쟁 협력을 주장하였다.

활동 사항

김한경은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 재학 중이던 1923년 2월 전조선청년당대회 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풍속 정화와 무산 계급의 문화 향상을 표방한 혁청단(革淸團)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1924년 1월 조선노동대회 후원회 집행위원을 맡았으며 12월 혁청단 집행위원회 사회운동자 간친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7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간부가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재학하고 있던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1926년 중퇴하였다. 김한경은 1927년 1월 5일 『조선일보』에 「우리들의 입장은 특수하다」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재일 조선인의 노동 운동 과정에서 일본 노동조합의 강령을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 오류를 비판하고 결함을 개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27년 4월 잡지 『이론투쟁』에 「방향 전환 과정의 자기비판」을 기고하였다.

김한경은 1927년 6월 당시 조선 공산당 당원이던 박낙종(朴洛鐘)의 권유로 조선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입당 후 조선 공산당 일본부를 만들고 선전부원을 거쳐 선전부장을 맡았다. 12월부터는 조선 공산당 일본부 서부 세포의 책임자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28년 2월 조선 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었으며 4월 조선 공산당 일본부가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으로 개칭되면서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6월 제4차 조선 공산당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 겸 정치교육부장 직을 맡아 활동하면서 8월 국치기념일 격문 살포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오사카에서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1930년부터 시작된 공판에서 김한경은 조선어 사용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법적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재판의 결과 1931년 3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33년 9월 일본 대심원에서 원심이 확정되었다.

1938년 7월 전향자들이 결성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본부 상임감사 및 문화부 부장에 선임되어 반공주의와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9년 6월 내선일체의 종합적 연구를 지향한 국민문화연구소의 전무이사가 되었으며 8월 잡지 『동양지광』의 편집부장을 담당하면서 내선일체 구현에 대한 일본정신 앙양의 수양도량을 제공하는 업무에 앞장선다. 또한 『삼천리』와 『조광』 등 여러 잡지에 친일 논설을 발표하여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하고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역설하였다. 김한경은 1939년 12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원의 자격으로 도쿠시마 연대 현창 사업에 국방 헌금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4(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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