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康有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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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康有鴻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이와테현 |
시대 | 근대/근대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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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
원어 항목명 | 康有鴻 |
성별 | 남 |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일본의 좌파 노동 단체에 참가하여 활동한 재일 조선인.
강유홍은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토목 노동에 종사하면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관동자유노동조합,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의 산별 조직인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전협토건]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와테현 게센군의 오후나토센 건설 공사 현장에서 가혹한 노동에 종사하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 700여 명과 일본인 노동자 100여 명이 1932년 4월 쟁의를 일으키려고 하자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상임위원회는 당시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의 본부위원이었던 강유홍 등을 현장에 파견하였다.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에서 파견된 강유홍, 김범이(金凡伊) 등은 4월 26일 쟁의위원회를 결성하고 10시간 노동, 임금 3% 인상, 민족 차별 반대 등 8개항에 이르는 요구 조건을 내걸고 200여 명의 노동자들과 쟁의에 돌입하였다. 교섭 결과 노동자 측의 요구 조건이 모두 수용되고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사측은 100여 명의 테러단을 조직하고 여기에 경찰과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쟁의단을 습격하였다.
폭력 조직 아리다구미[有田組]가 중심이 된 쟁의단 습격 조직은 5월 4일 오후 5시 1차 습격을 통해 쟁의의 후속 처리를 위해 현장에 남아 있던 강유홍 등에게 위해를 가하였다. 저녁 8시 30분부터 시작된 2차 습격에서 강유홍은 살해당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습격으로 조선인 노동 쟁의 지도자 구순암(具順巖)과 정순옥(鄭順玉)도 살해당하였으며 30여 명의 조선인이 부상을 당하였다. 사태가 폭력적으로 전개되고 사상자가 발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은 조선인 150여 명 내습이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면서 조선인 노동자를 구속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은 5월 8일 대책 회의를 열고 5월 9일 대책위원을 파견하였다. 대책위원회는 해방운동 희생자 구원회 변호사단의 협조를 얻어 폭력단 가운데 53명을 살인죄, 소요죄, 상해죄로 기소시킬 수 있었다. 대책위원회는 아리다구미에게 부상자 위문금은 받아서 전달하였으나 사망자에 대한 위자료는 유족의 거주지를 알 수가 없어 전달할 수 없었다. 6월 8일 3명의 사망자를 매장하면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