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李營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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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營根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9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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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90년 5월 14일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5월 25일 |
출생지 | 대한민국 충청북도 강내면 다락리 |
원어 항목명 | 李營根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1958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재일 통일 운동가.
이영근은 일제 강점기 회사를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진보계열에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이영근은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에서 태어났다. 1933년 청주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주도하다 퇴학당한 후 경복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광산 기계를 취급하는 이보합명회사(以保合名會社)를 설립하였다. 사업에 종사하면서 회사를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공간으로 제공하면서 여운형(呂運亨), 송진우(宋鎭禹)를 비롯한 좌우익의 많은 지도자와 교유하였다. 1943년 이후 만주 등 국내외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여운형의 건국동맹(建國同盟)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의 하부 기관인 보안대를 창설하는 데 참여하였다.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결성된 사회민주당에 참여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해 탈당하고 단독 정부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영근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농림부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지만 1949년 2월 사임하였다. 이후 태양신문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면서 1950년 5월 30일 청주에서 무소속으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1년 6월 조봉암과 함께 반(反) 이승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12월 7일 대남간첩단 사건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1심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이후 무죄로 풀려났다.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4월 10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영근은 일본 망명 후 조봉암 구명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조선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선신문』을 창간하였다. 해외평화통일운동 추진체로서 조선민족통일회의를 발족하였다. 1961년 2월 한국에서 조용수가 진보 성향의 일간지 『민족일보』를 창간하는 것을 후원하기 위해 재일 한인 사회에서 자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민족일보』 창간과 함께 통일운동추진연합전선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을 위해 일본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양측 인사의 교류를 실현시 키는 데 힘썼다. 이영근의 주선으로 1961년 2월부터 3월 사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조영주 단장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한덕수 의장 간의 연석회의가 2회에 걸쳐 개최되기도 하였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소는 이영근이 일본에 있는 간첩이라는 혐의를 전제로 이영근의 자금을 받은 『민족일보』를 폐간시키고 발행인 조용수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1962년 8월 이영근은 재일한국정치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여러 통일 운동가들의 일본 내 활동을 도왔으며, 1964년 10월 『통일조선연감』을 발간하였다. 『통일조선연감』은 통일 문제의 경과, 통일운동사, 통일 실현의 방법, 통일 문제 관련 내외 자료를 수록한 것으로 통일 실현 방법, 통일 후의 국가 구상까지 망라한 통일 이론을 담고 있다. 이후에도 통일 이론을 본격적으로 정비해 1965~1966년판, 1967~1968년판 『통일조선연감』을 발간하였다.
통일 운동 추진을 위한 조직으로 1965년 7월 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본부를 결성하고 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6년 4·19 6주년을 기념해 도쿄에 통일 운동 간부 양성 기관인 통일학원을 설치하였다. 1970년 11월 도쿄에서 민주조국통일회의를 결성하였으며, 결성 대회 기조 보고에서 북한을 개인숭배를 기조로 하는 전근대적 지배 체제라고 언급하며 북한의 세습 체제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1972년 9월 『통일일보』를 발간하고, 이를 통해 북한의 호전성을 규탄하고 한국의 통일 정책과 경제 성장에 성원을 보냈으며, 한국 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 내 대표적인 친한파 신문으로 성장시켰다.
남북 교류의 일환으로 모국 방문단 사업을 추진한 결과 1975년 9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재일한인 추석성묘단 방문을 성사시켰다. 1979년 주일공사 최세현(崔世鉉)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내각 책임제 개헌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1980년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전단계로 내각제 개헌과 남북한 정상 회담 개최를 주장하였다. 1987년 간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활동을 이어 갔으며, 1990년 5월 14일 도쿄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5월 25일 독립운동과 통일을 위한 노력을 인정해 이영근에게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