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朴春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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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春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4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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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2월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3월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6월 |
몰년 시기/일시 | 1973년 3월 31일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 |
원어 항목명 | 朴春琴 |
성격 | 정치인 |
성별 | 남 |
1921년 일본에서 상애회를 조직하고 친일 활동을 하였던 재일 한인 정치가이자 활동가.
박춘금은 1891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성장하였다.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육체 노동에 종사하면서 생활하였다. 나고야에서 거물급 폭력배로 성장하고 일본 폭력 조직 흑룡회의 우두머리인 도야마 미쓰루와도 교분을 맺게 되었다. 1921년 도쿄에서 이기동을 회장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부회장을 맡은 상애회(相愛會)를 결성하였다. 상애회는 민족적 차별 관념 철폐와 일선융화 철저를 기하고 조선인 노동자의 정신 교화와 경제적 구제를 꾀한다는 목표로 결성되었으며, 이를 위해 직업 알선과 공동 숙박소를 설립하였다. 상애회의 적극 후원자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과 마루야마 쓰루키치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으로 친일조직이었다. 상애회는 일본인 기업주 편에서 조선인 노무자를 폭력적 방식으로 착취하는 데도 앞장섰다.
박춘금은 상애회를 동원해 조선인 조직이나 단체의 운동을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와해시키거나 해산시키는 데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발생 후 조선인 노무자 300명을 동원해 봉사활동의 명분으로 시체 처리 등을 하며 일본 경시청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1924년 전라남도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하자 상애회 회원들을 동원해 반대파를 습격하였고, 1928년 일본인 지주의 요청으로 동원되어 하의농민회를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 1924년 3월 반일 사상 박멸과 일선융화를 표방한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에 참여하고, 1925년 9월 도쿄에서 일선융화를 표방한 일선구락부(日鮮俱樂部)의 발기인이 되었다. 1926년 상애회 회원을 동원해 가와사키의 조선인 노동 단체를 습격하였다. 전 조선 총독부 경무총감 마루야마 쓰루키치를 상애회의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일본의 융화정책에 앞장서는 행보를 꾸준히 보인 끝에 1932년 3월 제18회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선거에 도쿄 제4구에서 입후보해 당선하였다.
박춘금은 1936년 제19회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지만 1937년 재출마해 당선하였다. 재임 중 조선의 지원병 제도 시행에 관한 청원을 거론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경성에서 중추원 참의, 국민협회 간부, 경기도 도회의원들을 초청하여 시국간담회를 주최하고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 부여와 병역 문제, 의무 교육 실시 등을 논의하였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 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조선인 유럭자들을 모아 신궁 참배, 필승 기원 행사 등을 주관하였다. 국방비를 헌납하고, 조선인의 학병 출진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 1945년 대의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취임하였고, 7월 24일 경성부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하였다. 조선 총독부의 고위 관료들이 다수 참석한 자리에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청년이 폭탄을 던진 부민관 폭파 의거가 발생하였다.
해방 후 일본으로 도피하였고, 1949년 반민족행위 피의자로 지목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쿄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고문, 일한문화협회의 상임고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