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曺寧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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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寧柱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13년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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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79년 |
몰년 시기/일시 | 1996년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예천군 |
원어 항목명 | 曺寧柱 |
성격 | 사회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일본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재일 한인 사회 운동가이자 정치가.
조영주는 1913년 2월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보통학교 때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 1926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여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으며, 이 일로 퇴학을 당하였다.
조영주는 1932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립 교토중학교[京都中學校]를 졸업하고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예과를 거쳐 리쓰메이칸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대학 시절 일본 적색구원회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공산당 지도부의 전향에 대해 자신의 운동 노선에 대해 고민하였다. 이 시기 김문준(金文準)과 조몽구(趙夢九) 등과 교류하였다. 1938년 도쿠시마 세이자부로[德島淸三郞]와 이마다 신타로[今田新太郞], 1939년 일본 사회 운동가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등과 교류하면서 동아연맹론(東亞聯盟論)에 매료되었다. 이후 동아연맹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0년 교토조선인학우회장을 맡으면서 리쓰메이칸대학과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의 조선인 학생들을 동아연맹에 가입하도록 하였다. 1942년 치안유지법으로 검거되었다가 1944년 출옥하였다. 출옥 직후에는 동아연맹동지회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이시와라 간지를 경모해 동아연맹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46년 신조선건설동맹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기획실장, 한국 주일대표부 자문위원회 정치부 상임위원, 대한청년당장 등을 거쳐 1960년부터 1961년과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두 차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장을 역임하였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장 시절인 1977년 3월 28일 평화통일촉진본부를 설치하고 일본 내에서 평화 통일을 위한 제반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일본 내의 반한(反韓) 세력의 파괴 공작 분쇄에도 적극 노력하였다. 1979년 재일 한인 모국찾기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고주류[剛柔流] 공수도에 뛰어났으며, 1979년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 범사(範事) 공수도 9단을 수여받았다. 조영주는 1996년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조영주의 작품으로는 1949년 『왕도문화(王道文化)』10권 2·4호에 발표한 「입신의 동기[入信の動機]」[Ⅰ·Ⅱ], 1988년 『영구평화로의 길 : 지금, 왜 이시와라 간지인가[永久平和への道 : いま,なぜ石原莞爾か]』에 게재한 「이시와라 간지의 사람과 사상[石原莞爾の人と思想]」등이 있다.
조영주는 197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무궁화장을 수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