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원어 항목명 韓德銖
한자 韓德銖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7년 2월 18일
몰년 시기/일시 2001년 2월 21일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산군 안심면 동호동
원어 항목명 韓德銖
성격 사회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의장
정의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좌파계 노동 운동을 벌이고 이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의장을 맡은 재일 한인 사회 운동가.

활동 사항

한덕수는 1907년 2월 18일 경상북도(慶尚北道) 경산군(慶山郡) 안심면(安心面) 동호동(東湖洞)에서 태어났다. 한덕수의 다른 이름으로는 한원오(韓元五), 요시다 가쓰타로[吉田勝太郎]가 있다. 한덕수는 서당 등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대구의 기독교계 계명중학(啓明中學)에 진학하였다. 재학 시절부터 여름 방학에는 농촌에서 문자를 가르치는 등의 문화 활동을 벌이고, 18세 때는 계명중학 교원이 되었다. 1927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학(苦學)하고, 1929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專門部]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에스페란토 운동이나 일본 공산당계 노동조합인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32년 10월 검거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좌파계 노동 운동에 지속적으로 참가하여 아타미선[熱海線] 터널 공사 노동 쟁의를 지도한 일로 1934년 9월 다시 검거되어 징역 2년, 집행 유예 3년 판결을 받았다. 1937년 12월 15일 조선 해방을 기도한 혐의로 시즈오카현[静岡縣] 누마즈[沼津] 경찰서에 구류되었다. 또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본인에 따르면 해방 전 2년간 옥중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한덕수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세야[瀬谷][현 요코하마시 세야 추정]에서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직후부터 동포를 위한 활동을 개시하여 8월 20일 간토[關東] 지방 재일 한인 조직을 통합하여 발족한 재일조선인연맹[조련]에도 참가하였다. 1945년 10월 15일부터 10월 16일에 걸쳐서 개최된 창립 대회에서 가나가와현 선출 중앙위원으로서 참획(參劃)하여 총무부차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에도 좌파 단체의 성격을 강화한 재일조선인연맹 내에 있었던 문교국장, 의장단의 일원을 맡는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전후 초기의 재일 한인 운동은 좌파 계통의 조직에서도 다양한 활동가가 있었고, 조국의 정치 세력과도 관련되어 일본 공산당의 지도를 둘러싼 인식도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이른 시기부터 김일성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재일조선인축하단(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創建在日朝鮮人慶祝團)의 일원으로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였다. 축하단은 1949년 1월 김일성과 회견하여 재일 한인을 북한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단결시켜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좌파계 재일 한인 운동은 1949년 재일조선인연맹이 해산당한 이후 일본 공산당의 지도 아래에서 일본 혁명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중시하는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한덕수는 이를 문제시하여, 재일 한인은 북한의 공민(公民)으로 일본 정치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활동에 대한 참획을 부정하는 노선 전환을 주도하고, 1955년 5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발족시켰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6명의 의장단으로 이루어진 체제였고, 한덕수는 중앙상임위원 중 한 명이었는데, 1958년 이후에는 한덕수만 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체제를 지지하도록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도적 입장도 강화해 갔다.

북한 정권에 직결된 노선에 대한 비판이 일부에서 존재하면서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1950년대 이후 한덕수의 지도하에 귀국 운동의 고양(高揚)이나, 민족 교육, 상공인 단체 등의 활동을 축으로 많은 재일 한인을 조직하였다. 북한 정권도 재일 한인 지도자를 중시하여 1967년 최고인민회의대의원으로 한덕수를 선출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부의장으로 한덕수와 같이 최고인민회의대의원으로 선출된 김병식(金炳植)이 점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내에서 지도력이 강화되는데, 1972년 김병식이 실각당하자 한덕수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내에서 권력을 유지하였다.

1970년대 이후 한일 관계의 긴밀화나 북한 체제의 경직성이 분명하게 되는 등의 흐름을 배경으로 재일 한인 사이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영향력은 저하되어 갔다. 그러나 한덕수를 중심으로 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북한 정권을 지지하여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1986년 한덕수의 이름으로 『주체적 해외동포운동의 사상과 실천』을 출판하여, 김일성 정권을 지지하면서 북한의 해외 공민이라는 입장에서 재일 한인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덕수는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였을 때에는 평양에서 치러진 국장(國葬)에 참석하였고, 이때 서열은 4위였다. 김정일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도 북한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의장으로서 조직을 정비하다가 2001년 2월 21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한덕수의 장례식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장(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葬)으로 치러졌다.

참고문헌
  • 한덕수, 『주체적 해외 교포 운동의 사상과 실천』(미래사, 1986)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社會運動の狀況』(內務省 警保局, 1932, 1933, 1934)
  • 『近代日本社會運動史人物大事典』2(日外アソシエ-ツ, 1997)
  • 朴斗鎭, 『朝鮮総連: その虚像と実像』(中央公論新社, 2008)
  • 吳圭祥, 『ドキュメント在日本朝鮮人連盟: 1945~1949』(岩波書店,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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