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국

원어 항목명 鄭南局
한자 鄭南局
영문 Jeong Namgu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오사카부  일본 도쿄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2월 27일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활동 시기/일시 1920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27년 5월 10일
활동 시기/일시 1930년 5월 15일
활동 시기/일시 1950년 5월 30일
몰년 시기/일시 1955년 6월 19일
추모 시기/일시 1990년
추모 시기/일시 1992년 7월 8일
출생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거주|이주지 일본 오사카부|일본 도쿄도
학교|수학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시
활동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완도군|일본 오사카부|일본 도쿄도
묘소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원어 항목명 鄭南局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제2대 국회의원
정의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과 재일 조선인 차별 철폐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정남국(鄭南局)[1897~1955]은 완도에서 3·1 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1920년대에 청년 운동, 노농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공산당 일본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위원장 등으로서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여러 차례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고 구속되었다. 이른바 ‘제4차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징역 1년 8월을 언도받고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에 대한 차별 철폐 운동, 생활권 확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완도군 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所安面)에서 태어난 정남국은 활동 당시 정태성(鄭台星)으로도 불렸다. 정남국은 완도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광주 농업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전남 완도군 완도면 읍내에서 예수교와 천도교도를 규합하여 송내호(宋乃浩)·최형천(崔亨天)·신준희(申俊熙)·김경천(金景天)·강정태(姜正泰) 등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4월 완도에서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결성에 참여한 후 고향에서 청년 운동과 사회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후 전라노농연맹 위원, 남선노농동맹(南鮮勞農同盟) 집행 위원, 완도 소안면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 간부를 지냈다. 1924년에는 소안면에서 노농연합대성회를 개최하여 입회 경찰을 퇴장시키고 악질 지주인 이강채(李康彩)가 노농회를 반대하고 있으므로 절교할 것을 선언하는 등 항일 세력의 결집에 힘썼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1925년 5월 20일 광주 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공무 집행 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가 1925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남국은 1926년 6월 배달청년회 부회장이 되어 박흥곤(朴興坤)·송기호(宋琪浩) 등과 함께 사립 소안학교(所安學校) 내에 병설된 중학 강습소(中學講習所)를 비롯하여 면에서 개최되는 강연회와 배달청년회·독서회 등을 이용하여 항일 의식과 사회주의 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1926년 7월 13일 완도군 소안면민들의 갹출금(醵出金)으로 설립된 소안학교를 일제가 강제로 폐교시켜 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하려 하자 사회를 맡아 이를 반대하는 면민 대회를 진행하였으며, 면민이 원하지 않는 공립 보통학교를 강제 설립하려는 이유를 알기 위하여 김사홍 외 1명을 선발하여 전남도청(全南道廳)에 파견하기로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6년 8월에는 사상 단체인 ‘살자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정남국은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공산당 일본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5월 10일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완도 향우회(莞島鄕友會)·도쿄 향우회[東京鄕友會]와 협동하여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조직하고 집행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완도 사립학교의 강제 폐쇄에 대항하여 조선 총독부 실정반대실행위원회(失政反對實行委員會)를 조직하고 규탄 대회를 개최하였다. 1927년 6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위원장으로서, 오사카 항구에서 4개 단체 위원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 대회가 열릴 때 축사를 하다가 한때 일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1927년 8월 7일 전남 완도 소안학교의 강제 폐교에 반대하여 복교 운동(復校運動)이 맹렬하게 일어나 도쿄와 오사카의 재류 완도 향우회에서 복교 동맹(復校同盟)을 조직할 때 대표가 되어 도쿄로 파견되었다. 신간회(新幹會) 도쿄지회[東京支會]의 강소천(姜小泉)과 함께 일본 내각 문부대신과 학무국에 일제 식민 통치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1928년 5월 재일조선노동총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국내에서 급파된 형사대에 의해 도쿄에서 검거되었다. 이때는 무사히 석방되었으나 이후 이른바 ‘제4차 조선 공산당(朝鮮共産黨) 사건[일명 춘경원당 사건]’에 연루되어 1929년 7월 18일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9년 9월 8일 신의주 지방법원을 거쳐 1930년 5월 15일 평양 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언도받았다.

정남국은 감옥에서 나온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고물상을 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 철폐와 생활권 확립을 위한 운동에 관여했으며, 이때에도 잦은 탄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15 해방 후 귀국하여 완도군 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묘소

정남국은 1992년 7월 8일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남국은 1990년에 항일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 『독립 유공자 공훈록』9(국가보훈처, 1991)
  • 『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外村大, 『在日朝鮮人社會の歴史學的硏究』(緣蔭書房, 2004)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