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원어 항목명 李進熙
한자 李進熙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9년
수학 시기/일시 1944년 3월 24일
수학 시기/일시 1950년 4월~1954년 3월
수학 시기/일시 1957년 3월
몰년 시기/일시 2014년 4월 15일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김해군 녹산면 미음리 와룡 마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와룡 마을]
묘소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와룡 마을 뒷산
원어 항목명 李進熙
성격 역사학자
성별
본관 경주(慶州)
대표 경력 일본 와코대학[和光大學] 교수, 명예교수
정의

해방 이후 일본에서 활동한 재일 한인 역사학자.

개설

이진희는 1929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나 1948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역사학자, 고고학자, 문필가, 대학교수로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계열에서 활동하였으나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껴 조선대학을 사직하였다. 1984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1972년 일본이 중국 동북 지방의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을 개찬하였다는 주장을 펴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가계

이진희는 아버지 이상환(李相環)과 어머니 이강련(李康連)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오문자(吳文子)이며, 이경순(李京順)·이명호(李明浩)·이영철(李英徹) 등 1녀 2남의 자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진희는 1929년 경상남도 김해군 녹산면 미음리 와룡 마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와룡 마을]에서 태어났다. 1944년 3월 24일 녹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업실천학교[중학 과정]를 다녔다. 경남상업학교[현 부경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48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계열의 미토소학교[水戶小學校]에서 임시 교사로 근무하였다. 학교가 폐쇄되자 1950년 4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고고학을 전공하였으며, 1954년 3월 졸업하였다. 1957년 3월 메이지대학 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1955년 4월부터 1961년 4월까지 도쿄 조선고등학교,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대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조선대학에서는 역사·지리학과 소속으로 고고학과 조선고대사를 담당하였다. 조선대학 교수 시절인 1966년 무렵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껴 잘못을 저질렀으면 바로잡는 일을 주저하지 말라는 『논어(論語)』의 구절을 떠올리며 사회주의와 결별하였다. 1971년 조선대학도 사직하고 이후 1976년 4월부터 1994년 3월까지 메이지대학에서 동양고고학 시간 강사, 1978년 4월 와코대학[和光大學]에서 시간 강사로 출강하였다. 1984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94년 와코대학 인문학부 교수가 되어 2000년 3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재직하였으며, 퇴임 후에는 명예 교수가 되었다.

이진희는 고고학을 전공하였지만 관심 분야는 일본 속의 한국 문화, 조선통신사, 광개토왕릉비, 일본 열도의 고대 산성(山城) 등 다양하였다. 역사학자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다. 이진희가 광개토왕릉비 연구에 관심을 둔 것은 4세기 후반 왜(倭)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한반도에 출병하여 남부 지방을 지배 통치하였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된 것이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1972년 『광개대왕릉비의 연구』를 간행하고, 이전까지 이 비문을 근거로 고대에서의 조선 지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정설로 여겨 오던 일본 역사학계에 파문을 일으키며 비문의 공동 조사와 재검증을 제기하였다.

이진희는 20세기 초 현지 조사 과정에서 찍은 각종 사진들과 탁본을 근거로 일본의 참모본부가 비의 표면에 석회를 바른 후 글자를 왜곡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의 탁공[탁본을 뜨는 사람]이 탁본의 질과 양산을 위해서 비에 석회를 발랐다는 현재 통설과는 차이가 있으나 이진희의 주장이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관심과 주목을 불러일으킨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비의 표면에 석회가 발린 것은 확실한 만큼, 글자의 왜곡이 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이진희였다.

한편 1962년 『조선역사연표』, 1963년 『관동대진재에서의 조선인 학살의 진상과 실태』[조선대학교]를 박경식(朴慶植)과 함께 정리해 간행하였다. 1966년 『조선문화와 일본』을 간행하였으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의해 폐간 처분되었다.

이진희는 문필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교토의 재일 한인 사업가 정조문이 1968년부터 발행한 『일본 속의 조선문화』의 발행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1975년 2월 서채원·김달수·이철·강재언·사토 노부유키·위양복 등과 『계간 삼천리』의 창간을 주도하여 편집장으로 취임하였다. 『계간 삼천리』는 근대 100년의 한·일 관계를 주제로 한 문화 종합지였다. 일본에서 한때 가장 애독된 『계간 삼천리』는 1987년 5월 제50호로 종간하였다. 『계간 삼천리』를 잇는 『계간 청구』의 창간도 주도적으로 하여 편집장으로 취임하였다. 1989년 8월 창간된 『계간 청구』는 1996년 5월 제25호로 종간하였다.

이진희는 대학 교수로서 학자, 문필가로 활동하였지만 정치에도 관심이 높았다. 1974년 박정희 군사 정권은 긴급 조치 위반 등 반정부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시인 김지하(金芝河)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이에 이진희는 김지하의 석방을 요구하는 단식 투쟁을 두 차례 결행하였다. 『계간 삼천리』의 창간 특집을 김지하에 대한 내용으로 채우는 등 지식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을 보여 주었다.

1981년 3월 김달수·강재언과 함께 해방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였다. 재일 한인 수형자들에 대해 관용을 청원하는 교포 문필가들의 고국 방문단의 일원으로였다. 방문의 목적은 일본의 문학계·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필가로서 재일 한인 수형자에 대한 관용적인 배려를 법무부 장관에게 청원하고, 고국의 변모를 실제로 살펴봄과 동시에 고대 유적을 견학하고 고향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수형자라 함은 5·18 민주화운동을 포함해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수감된 정치·사상범을 말한다. 1984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이후 자유로이 고국을 방문하였다. 1985년 7월 한국 국적으로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1998년 4월 중국 동북 지방의 고구려 유적을 탐방하였다. 이진희는 일본에서 폐암으로 투병하다 2012년 4월 15일 82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진희의 저작 중 단행본은 1966년 7월 『조선문화와 일본[朝鮮文化と日本]』을 시작으로 1972년 10월 『광개토대왕릉비의 연구[廣開土王陵碑の硏究]』[이 책은 1982년 『광개토왕릉비의 탐구』[이기동 옮김, 일조각]로 한국에 소개], 1973년 11월 『호태왕비의 미스터리[好太王碑の謎]』, 1976년 11월 『이조 통신사[李朝の通信使]』[講談社], 1977년 10월 『호태왕비와 임나일본부[好太王碑と任那日本府]』, 1980년 1월 『일본 문화와 조선[日本文化と朝鮮]』, 1980년 11월 『광개토대왕릉비와 칠지도[廣開土王陵碑と七支刀]』, 1982년 12월 『한국과 일본 문화』[을유문화사]가 있다. 또한 1984년 1월 『왜관 왜성을 걷다[倭館 倭城を步く]』[六興出版], 1986년 5월 『한국 속의 일본』[동화출판공사], 1987년 4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江戶時代の朝鮮通信使]』, 1988년 9월 『한국의 고향을 가다[韓國の古都を行く]』, 1994년 9월 『한국과 일본의 교류사[韓國と日本の交流史]』, 1995년 3월 『신판 일본문화와 조선[新版日本文化と朝鮮]』, 1997년 10월 『역사 기행 고구려 발해를 가다[歷史紀行 高句麗 渤海を行く]』, 2003년 6월 『호태왕비 연구와 그 후[好太王碑硏究とその後]』 등이 있다. 이 밖에 공편 및 편저 12권, 논문과 서평,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한 글은 400여 편이 있다.

묘소

이진희의 묘소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와룡 마을 뒷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진희는 2001년 3월 KBS 해외 동포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 이진희, 『해협: 한 재일사학자의 반평생』(이규수 옮김, 삼인, 2003)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 위키피디아 재팬(https://ja.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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