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해

원어 항목명 金天海
한자 金天海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5월 10일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울산군 방어진
원어 항목명 金天海
성격 사회주의 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정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일본과 북한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개설

김천해는 1898년 5월 10일 경상남도 울산군 방어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학의이다. 김천해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후 통도사에서 수행하였는데 이때 법명이 천해였다. 1916년 중앙학림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김천해는 고향에 돌아와 야학을 열어 지방의 농민을 교육하였다.

활동 사항

김천해는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에 입학하였다. 노동 운동에 입문하여 1922년 11월 도쿄 조선노동동맹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하고 노동자의 복리 증진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였다. 요코하마[橫浜] 일대에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1925년 1월 도쿄에서 창립된 사상단체 일월회(一月會) 회원이 되었다. 1925년 7월 가나가와현 조선합동노동회를 결성하여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1928년 5월부터 집행위원장 겸 쟁의부장으로 재일 한인 노동 운동을 지도하였다. 이 무렵 조선 공산당에 입당하여 6월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일본총국 남부야체이카에 배속되어 1928년 6월 초순 남부야체이카 회의에 참석해 정희영의 보고에 기초하여 투쟁 방향에 대해 협의하였다. 1928년 6월 24일 회의에서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 개편의 내용을 송창렴(宋昌濂)으로부터 들었고 본인이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가 된 것을 접수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송창렴으로부터 당의 연혁, 조직의 대요, 입당 수속 등에 대해 보고받았고, 계속된 간부회의에서 동부야체이카 책임을 맡고 지속적으로 일본총국을 지도하였다. 특히 한림이 검거된 뒤 후임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신간회 도쿄지회, 도쿄조선노동조합 내의 조직 활동에 주력하였다.

김천해는 1928년 10월 체포되어 징역 5년을 판결받았다. 감옥에서도 옥내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대표적으로 3·1운동기념투쟁, 메이데이투쟁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감방신문』을 발행하였다. 특히, 일국일당주의에 따라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이 일본 공산당 내로 해소할 때 옥내에서 주도하였고, 공판 때는 조선 공산당, 공산주의운동사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선 공산당을 대표해 진술을 시도하였다. 1932년 6년 징역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사노 마나부[佐野學]의 전향성명서를 접하고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였다.1935년 12월 이운수·박태을 등과 함께 『조선신문』[한글]을 발행하였다. 간토·주부·호쿠리쿠 지방으로 지국과 조직을 확대하였다. 1936년 8월 다시 검거되어 징역 4년의 판결을 받았다. 형기 종료 후에도 예방구금(予防拘禁)으로 구금되었다가 1945년 10월 10일 후추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출옥 하자 비전향 일본공산주의자 6인과 함께 일본 공산당 확대강화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이 되었고, 12월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조선인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고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1947년 2월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겸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 제5차 대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축하를 위한 조국경축사절단장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재일본조선인연맹 해산 명령과 함께 공직 추방을 당하였다.

김천해는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가 1956년 노동당 제3차 전당 대회에서 중앙위원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에 뽑혔다. 1957년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상임위원회 위원,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내고, 1958년 노력훈장을 수여받았다.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 1962년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1970년 11월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천해는 1953년과 1958년 두 차례에 걸쳐 북한 정부에서 노동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 『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이청원, 「일본공산당의 조선 사람 지도자 김천해」(『신천지』1-6, 1947)
  • 김인덕, 「1920년대 재일조선인운동과 김천해」(『우송조동걸선생 정년기념논총』Ⅱ, 나남출판, 1997)
  • 樋口雄一, 「金天海について」(『在日朝鮮人史硏究』18, 1988. 10)
  • 위키피디아 재팬(https://ja.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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