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건

원어 항목명 李熙建
한자 李熙建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7년 6월 29일
몰년 시기/일시 2012년 3월 21일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산시
원어 항목명 李熙建
성격 기업가
성별
정의

1917년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나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한 재일 한인 기업가.

활동 사항

이희건은 1917년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으며, 일본명은 히라타 요시오[平田義夫]이다. 1940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였다. 1945년 패전 후 오사카의 암시장 쓰루하시[鶴橋] 국제마켓에서 자전거 등을 판매하면서 초기 자본금을 모았다. 1945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승인한 국제상점가연맹의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56년 오사카흥은[大阪興銀]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금융업에 진출하였다. 이희건은 예금 이자 선불 등의 적극적인 경영 방침을 수립하면서 오사카부[大阪府] 내의 신용 조합 중 예금 획득 2위를 차지하였으며, 철저한 고객주의를 경영 방침으로 내세워 신용 조합을 최대 기업으로 발전시켰다.

이희건은 한국 정부의 금융자율화정책을 바탕으로 한국 금융계 진출을 모색하였다. 1982년 재일 한인이 100% 출자해서 한국에 만든 첫 순수 민영 은행인 신한은행을 설립할 때에도 주도적으로 움직였다. 당시 이희건과 함께했던 재일 한인들은 신한은행의 창립 주역 341명 가운데 최대 공로자로 이희건 회장을 꼽았다. 이희건은 창립 리더로 주주를 모집하고, 정부를 상대로 한 은행 설립의 청원을 성사시켰으며, 창립 후에는 자신이 대표로 있던 은행의 경영 노하우를 신한은행에 전수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신한은행 창립 시 확립한 경영 이념은 다른 은행과 명확한 차이를 보여 준다. 나라를 위한 은행, 대중의 은행이 되자는 이념으로, 첫 번째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재일 한인의 마음을 담았으며, 두 번째는 고객과의 소통을 통해 가까이 있는 은행을 만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대기업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유망 중소기업을 발굴하고 육성하고자 하였다. 당시 한국의 시중 은행들이 점포 안 장사를 뜻하는 홀 세일 경영에 머물러 있을 때 이희건의 시도는 매우 놀라운 변화로 보였을 것이다. 1993년 오사카흥은의 보통은행 전환을 목표로 4개 재일 한국계 신용 조합을 합병하였으며, 신용 조합 간사이흥은[關西興銀]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하지만 합병하였던 4개의 신용 조합에서 많은 불량 채권들이 발견되면서 이희건의 경영권도 압박을 받아 결국 경영 파산이 일어났다. 2002년 금융 정리 관리인의 부정 융자 의혹 등의 배임 혐의로 이희건을 비롯한 모든 경영진을 고발하면서 강제 수사 및 기소를 당하였지만 이희건은 무죄를 주장하였다. 이희건은 2011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희건은 체육훈장 청룡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신한금융그룹에서는 이희건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17년 7월 7일 기념음악회를 개최하였다. 경상북도 경산시 영남대학교에 이희건 기념관이 있고, 재단 법인 이희건 한일교류재단이 있다.

참고문헌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파이낸셜뉴스』(2017. 7. 9)
  • 『이데일리』(2017. 7. 6)
  • 다음 백과사전(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91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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