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朴容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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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容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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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朴容七 |
성별 | 남 |
1920년대 일본 도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용칠은 1910년 12월 5일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로 유학하여 중앙보통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1929년 8월 5일 안성재회학생회가 주최하는 강연회에 참가하여 강연을 하였으며, 1930년 12월 19일 서울 학생 동맹 휴학 격문배포사건으로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1935년 메이지대학의 조선유학생 동창회[회원 391명]의 기관지인 『동창회보(同窓會報)』의 발행인이 되었다. 1936년 6월 장재성(張載性)·윤억병(尹億炳) 등 유학생 30여 명과 함께 재도쿄 조선유학생연구회(朝鮮留學生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창립 취지문에서는 각 대학 동창회와의 조직적 단결과 민족 운동에 통일을 기한다고 밝혔다. 조선유학생연구회의 총무 겸 대표가 되어 소식지 편집 등으로 활동하였고, 일제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학술 연구 단체를 표방하였다. 조선유학생연구회는 학술 연구뿐만 아니라 좌담회와 총회를 통해 합법과 비합법 회합을 가졌고, 일본 사회주의자와 노동 운동가 및 민족 운동가를 초빙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1938년 장재성·윤억병 등이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됨에 따라 조선유학생연구회는 해산되었다. 이후 박용칠의 활동과 사망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