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元心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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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心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06년 12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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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4년 3월~1918년 2월 |
수학 시기/일시 | 1920년 3월~1922년 |
수학 시기/일시 | 1925년 4월~1925년 9월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6월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10월 |
몰년 시기/일시 | 1971년 7월 4일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충청남도 평택군 읍내면 안정리 175번지[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175번지] |
학교|수학지 |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구단미나미 4-8-24 |
활동지 |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 1-7-32 |
묘소 | 일본 도쿄도 아키루노시 구사바나 3036 |
원어 항목명 | 元心昌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원심창은 1906년 12월 1일 충청남도 평택군 읍내면 안정리 175번지[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175번지]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심창은 1918년 2월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3월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2년경 중동학교를 중퇴하고 12월경 일본 도쿄도[東京都]로 건너갔다.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1925년 4월 니혼대학 사회학과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학비를 대지 못해 9월 자퇴하였다. 이때 무산학생학우회(無産學生學友會)와 도쿄조선무산자동맹[東京朝鮮無産者同盟]의 주요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나키즘에 대한 책을 탐독하는 한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고 실제적 운동을 위해 1925년 말 아나키즘 단체인 흑우회(黑友會)에 가입하여 흑우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5월 장상중, 육홍균, 김정근, 정태성, 한예상, 최규종, 이홍근, 최규동, 이원세 등과 도쿄 다카다정[高田町] 조시가야[雜司谷] 431번지에 흑색운동사(黑色運動社)라는 간판을 걸었으며, 7월 11일 일본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색청년연맹이 주최하는 무산정당비판박멸연설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여 연설하던 중 불온언사가 있다고 하여 검거되었다.
1926년 7월 23일 박열 사건으로 박열과 함께 구속된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우쓰노미아형무소[宇都宮刑務所]에서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최규종, 육홍균 등과 함께 진상 조사에 착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무소에서 관리하는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유해를 발굴하여 화장한 후 박열의 선산인 문경에 안치하였다. 1926년 11월 육홍균과 함께 흑색운동사를 흑색전선연맹(黑色戰線聯盟)으로 변경하고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한일 아나키즘운동의 공동전선을 형성하였다. 12월 장상중, 이홍근, 박망 등과 함께 박열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목적으로 흑색전선연맹을 불령사(不逞社)로 개편하고 기관지로 『흑우(黑友)』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고 1927년 2월 흑풍회(黑風會)로 개칭하고 조선노동총동맹계의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을 세포조직으로 산하에 두었다. 또한 2월 말 오우영 등과 중심이 되어 별동대로 조선자유노동자연맹(朝鮮自由勞動者聯盟)을 조직하는 한편 우의 단체로 1927년 6월 조선인신문배달인조합, 조선자유노조연맹 에도부[江東部]와 조선자유노조연맹 야마노테부[山手部], 오자키조선인일반노동조합[大崎朝鮮人一般勞動組合] 등을 산하에 설치하는 데 노력하였다.
원심창은 노동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1926년 9월 10일 최낙종, 김상렬 등과 함께 조선인 위생인부를 결속시켜 동흥노동동맹을 조직하고 이홍근, 장상중 등과 함께 선전대에 편성되어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를 순방하면서 『자유사회(自由社會)』를 배부하였다. 그리고 동흥노동동맹 조직을 확대시켜 다카다부[高田部)], 지카부[千佳部]의 지부를 두었다.
1928년 1월 15일 장상중, 한하연, 이시우, 최낙종, 정태성 등과 함께 흑풍회를 흑우연맹(黑友聯盟)으로 개칭하고 기관지로 『호조운동(互助運動)』을 발행하여 조직과 선전을 강화하였다. 흑우연맹은 조직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격문을 발표하는 한편 반대파를 습격하는 등 폭력적인 양상도 없지 않았다. 1927년 2월 친일 단체인 상애회(相愛會) 회원들이 우의 단체인 자유노조연맹원의 일터에서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 있었는데, 흑우연맹원과 함께 1928년 2월 상애회 행동대장 하고봉(河古奉)을 폭행하였다. 이에 상애회는 경찰에 후원을 받아 권총,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고 흑우연맹과 아나키스트의 회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던 계림장을 습격하였다. 상애회 회원의 습격 사건으로 한하연 등 일부가 일경에 피체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사건은 정당방위로 인정되어 모두 무죄로 풀려났지만, 5월 이혁과 함께 재도쿄조선노동조합 북부지부를 습격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29년 6월 7일 김병운, 이시우, 하경상, 한하연, 양성기, 최복선 등과 함께 도쿄유학생학우회가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계의 연합으로 춘계대운동회를 개최하기 위해 협의하자 도쿄 신간회 사무소를 습격하였다. 학우회 습격 사건으로 흑우연맹원 권상근이 사망하고 신간회의 유원우, 김기석 등 5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최복선, 한하연, 백병련, 정진모, 정찬진, 유종기 등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가 1930년 4월 29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더 이상 일제 당국의 감시에 일본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한 후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1930년 일본을 탈출 베이징[北京]을 경유하여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1931년 6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조직을 재건하는 한편, 11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는데 각각 참여하였다. 그리고 의열 투쟁에도 적극 참여하여 1932년 12월 16일 텐진[天津]의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만주 포기를 종용하기 위해 국민당 주요 인사를 초청하여 육삼정에서 연회를 개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백정기, 이강훈 등과 함께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을 시도하다가 암살 직전 송강춘(松江春)에서 피체되어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 사건은 육삼정(六三亭) 의거로 널리 알려졌다.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 사건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일제와 친일 국민당의 계략이 알려지면서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려는 일제의 공작은 실패하였다.
이후 나가사키[長崎]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무기형을 언도받고 가고지마[鹿兒島] 나카노형무소[中野刑務所]에서 복역 중 일본의 패망으로 1945년 10월 10일 출옥하였다. 해방 후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박열과 함께 신조선건설동맹을 창설하고 부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0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창설에 참여하여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후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부단장과 단장 및 고문, 독립노동당 일본특별당부 결성, 조국평화촉성협의회 중앙대표위원 겸 사무총장, 『통일조선신문』[현 『통일일보』] 창간 및 대표, 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본부 결성 및 대표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73년 7월 4일 사망하였다.
원심창 관련 작품으로는 사망 이후 1979년 원주원씨중앙종친회에서 간행한 『의사 원심창』이 있다.
원심창의 묘소는 일본 도쿄 아키루노시[あきる野市] 훗사역[福生駅] 근처 다이교지[大行寺]에 있다.
원심창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2013년 12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으며, 2014년 10월 10일 출생지인 경기도 평택시에서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기념사업과 추모 행사를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