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혁주

원어 항목명 張赫宙
한자 張赫宙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5년 10월 13일
몰년 시기/일시 1997년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원어 항목명 張赫宙
성격 소설가
성별
정의

1905년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출생하여 일본에서 활동한 재일 한인 1세대 대표 작가.

활동 사항

장혁주는 1905년 10월 13일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장은중(張恩重)이다. 경주 계림보통학교와 간역농업학교 재학 중 역사와 일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20세 무렵에는 아나키스트 단체에 가입하였다. 사립보통학교 교원, 공립보통학교 촉탁교원으로 재직하다가 교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1년간 보통학교 교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장혁주는 1932년 4월 잡지 『개조(改造)』의 현상 소설에 식민지하의 농민의 고난과 분노를 그린 「아귀도(餓鬼道)」가 입선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등단 후 야스타카 도쿠조[保高徳蔵]의 『문예수도(文芸首都)』 동인이 되었다. 1934년 개조사(改造社)에서 소설집 『권이라는 남자[権という男]』를 출판하였으며, 이 무렵 한글로도 소설을 써서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1938년 각본 「춘향전(春香伝)」이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의 신협 극단에 의해 일본과 조선에서 순회 공연을 하였다.

1939년 대륙개척문예간화회(大陸開拓文芸懇話会)에 참가하는 등 일본의 전시 체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하였다. 1943년 황도조선연구위원회(皇道朝鮮研究委員会)의 위원이 되었으며, 1944년 일본의 정책을 옹호하는 소설집 『이와모토 지원병[岩本志願兵]』을 출판하였다. 해방 이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재일본대한민국민단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좌·우익 양 진영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에 머물다가 1950년 한국 전쟁을 취재한 『아, 조선[嗚呼朝鮮]』을 1952년 5월 출간한 후 일본에 귀화하여 노구치 미노루[野口稔]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출판된 『아, 조선』이 장혁주라는 필명을 쓴 마지막 작품이었으며, 이후 집필한 『무궁화(無窮花)』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라는 일본 필명으로 출판되었다. 1954년 9월 일본농민문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 후 역사 소설과 미스터리 등 다채로운 영역의 작품을 남겼으며, 1998년 2월 1일 사이타마현[琦玉縣]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장혁주의 작품으로는 1933년 『권이라는 남자』, 1935년 『인왕동시대(仁王洞時代)』, 1938년 『춘향전(春香傳)』, 1939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1940년 『애증의 기록[愛憎の記録]』, 1943년 『개간(開墾)』, 1944년 『이와모토 지원병』, 1946년 『고아들[孤児たち]』, 1947년 『인간의 선과 악[人の善さと悪さと]』, 1948년 『우열한(愚劣漢)』, 1950년 『비원의 꽃[秘苑の花]』, 1956년 『그늘의 아이[ひかげの子]』, 1958년 『검은 지대[黒い地帯]』, 1961년 『무사시병영[武蔵陣屋]』, 1975년 『바람의 시[嵐の詩]』, 1977년 『한과 왜[韓と倭]』, 1980년 『질그릇과 검[陶と剣]』, 1989년 『마야 잉카의 조몬인을 좇다[マヤ·インカに縄文人を追う]』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참고문헌
  •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 시라카와 유타카, 『장혁주 연구』(동국대학교 출판부, 2010)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임종국, 『친일 문학론』(민족문제연구소, 2013)
  • 장세진, 「귀화의 에스닉 정치와 알리바이로서의 미국: ‘해방’ 이후 장혁주의 선택과 「아, 조선(嗚呼朝鮮)」」(『현대문학의 연구』45, 한국문학연구학회, 2011)
  • 김재용, 「혈통주의적 “내선일체”를 통해서 본 만주와 만주국 일제 말 만주를 재현한 장혁주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민족문화연구』45, 한민족문화학회, 2014)
  • 위키피디아 재팬(https://ja.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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