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부

원어 항목명 韓武夫
한자 韓武夫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일본 오사카부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31년
몰년 시기/일시 1998년
출생지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이카이노
원어 항목명 韓武夫
성격 시인
성별
정의

1931년 일본 오사카부에서 태어나 활동한 재일 한인 단가 시인.

활동 사항

한무부는 1931년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이카이노[猪飼野]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망하고 아버지와는 생이별하였기 때문에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1937년 쓰루하시 심상소학교[鶴橋尋常小学校]에 입학하였으나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학급 배정을 받지 못해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였다. 1945년 이카이노고등소학교[猪飼野高等小学校]를 학도 동원된 채로 졸업하였다. 황민화 교육의 영향을 받은 한무부는 소년병에 지원해 합격하였지만 얼마 후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교토[京都]로 옮겨 리쓰메이칸고등학교[立命館高等學校]에 입학하였으나 학비를 내지 못해 퇴학당하였다. 이후 한무부는 이바라키현[茨城県]에 살던 아버지를 찾아가 양돈 사업과 밀주 제조를 도왔다. 그러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꾸린 가정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따로 지내게 되었다.

한무부는 1950년 한국 전쟁 시기를 지내면서도 양 진영으로 분열된 재일 한인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문학의 길을 걷고자 하였다. 특히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가 한일 병합 때 읊었다고 하는 “지도상의 조선을 시커멓게 먹으로 칠하면서 가을바람 소리를 듣는다.”는 한 수에 크게 감동을 받은 것을 계기로 단가(短歌)를 짓기 시작하였다. 척추 마비를 앓으며 1년 정도 요양 생활을 하다가 다시 아버지의 파친코 사업을 도우면서 단가를 지어 신문과 잡지 등에 투고하였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이바라키판[茨城版] 단가란(短歌欄) 심사위원 오노 노부오[大野誠夫]의 사랑(砂廊)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단가를 공부하였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후 1956년 오사카로 돌아가 화학 공장에서 일하였다. 그즈음 단가연구신인상(短歌硏究新人賞) 가작에 당선되고 제3회 가도카와상[角川賞] 후보에 오르면서 서서히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북한 귀국 사업이 한창이던 1959년 무렵 잡지 『단가(短歌)』는 1960년 12월호에 재일 한인 가인(歌人)의 단가와 평론을 수록한 특집 ‘조국을 노래하다’를 기획하는데, 여기에 작품을 의뢰받은 것을 계기로 한무부는 1963년 봄 사랑의 후신인 작풍(作風)에 복귀하여 다시 단가를 지었다. 여러 차례의 공백을 거치면서 지은 단가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 유일한 가집인 『양의 노래[羊のうた]』[1969]이다. 한무부는 『양의 노래』라는 제목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양의 해에 태어나 양처럼 길을 잃고 양처럼 소극적으로 살아 온 한 조선인의 가난한 한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후기에서 밝혔다. 1992년 가을 뇌질환으로 쓰러져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8년 사망하였다. 한무부라는 본명 외에도 시기에 따라 니시하라 다케오[西原武夫], 고이즈미 다케오[小泉武夫]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한무부의 작품으로는 1969년 출간된 『양의 노래』가 있다.

참고문헌
  • 『재일 동포 문학과 디아스포라』(제이앤씨, 2008)
  • 韓武夫, 『羊のうた』(桜桃書林,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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