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張斗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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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斗植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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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원군 |
원어 항목명 | 張斗植 |
성격 | 작가 |
성별 | 남 |
1937년 문학 활동을 시작해 일본에서 소설 창작과 잡지 창간 등 다양한 문학 활동을 벌인 재일 한인 1세대 문학자.
장두식은 1916년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태어나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환경에 있었던 장두식은 학업이나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 힘들었으나 21세가 되던 1937년 김달수와 만나 등사판 회람지 『오타케비[雄叫び]』를 함께 발행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장두식은 가족 부양을 위해 남양군도(南洋群島)로 가서 일하는 등 학업과 문학 활동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남양군도에서 돌아온 뒤에는 김달수의 소개로 1942년 4월부터 1945년 6월까지 약 3년 동안 가나가와 신문사[神奈川新聞社] 기자로 일하였으나 총력전 체제하에서 자유로운 문학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해방 후인 1946년 김달수와 함께 『민주조선(民主朝鮮)』을 창간한 이후부터 「중매쟁이[仲人]」[1946], 「퇴거[立退き]」[1946], 「조부(祖父)」[1947], 「귀향(帰郷)」[1947], 「운명의 사람[運命の人々]」[1950], 「데릴사위[婿養子]」[1963]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인은 이렇게 생각한다[朝鮮人はこう思う]」[1946], 「우리들 조선인의 입장[われら朝鮮人の立場]」[1947], 「조선인 교육 문제의 측면[朝鮮人教育問題の側面]」[1948] 등의 평론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58년 11월 문예 잡지 『계림(鶏林)』을 창간, 발행하여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걸어 온 길[私の歩いてきた道]」을 연재하였다. 『계림』이 5호를 끝으로 폐간되자 연재물의 제목을 「어느 재일 조선인의 기록[ある在日朝鮮人の記録]」으로 바꾸고 잡지 『현실과 문학[現実と文学]』에 1964년 4월까지 24회 연재하였다. 연재를 바탕으로 1966년 2월 같은 제목의 단행본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잡지 『민주조선』에도 역시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속의 조선인[日本の中の朝鮮人]」을 14회 연재하였으며 1969년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장두식은 다작한 작가는 아니지만 소설 창작과 시리즈 연재, 잡지 창간 등 다양한 문학 활동을 벌인 재일 한인 1세대 문학자이다.
장두식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81년 『어느 재일 조선인의 기록』이 있으며, 이외에 1946년 「중매쟁이」 등의 단편 소설과 1946년 「조선인은 이렇게 생각한다」 등의 평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