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원어 항목명 崔承喜
한자 崔承喜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1년
몰년 시기/일시 1969년 8월 8일
출생지 조선 개성
묘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
원어 항목명 崔承喜
성격 무용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활동한 현대 무용가.

개설

최승희는 1911년 개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춤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26년 16세 때 경성에서 공연하였던 이시이 바쿠의 무용을 보고, 일본으로 넘어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서 무용을 배웠다. 1929년 독립하면서 독자적인 무용 세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활동 사항

최승희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37년부터 2년간에 걸친 유렵과 남미 순회 공연이었다. 순회 공연을 계기로 최승희는 일본과 한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인정받는 무용가로서 자리잡게 된다. 일본에서는 화장품과 백화점 등의 모델 활동뿐 아니라 가수 활동까지 하는 등 높은 인기를 누렸고, 한 잡지의 기획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미인 중 한 명으로 뽑힐 정도의 인지도가 높았다. 해방 이후 남한의 혼잡한 정치 상황을 피해, 최승희는 남편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갔다. 북한에서 최승희는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만들어 많은 현대 무용가를 배출하였다. 조선 무용의 기초를 만드는 데 주력하면서, 북한의 무용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술 및 작품

최승희는 1930년대 「파우스트」·「광상곡」·「그들의 로맨스」·「그들의 행진곡」·「흙을 그리워하는 무리」 등 가극과 창작극을 발표, 공연하였다.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하였으며, 4년간 세계 무대로 진출하여 유럽에서는 「초립동」·「화랑무」·「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무」·「옥저의 곡」·「보현보살」·「천하대장군」 등을 공연하였다. 1941년 10월 일본 오사카[大阪]회관에서 협화회원을 위로하는 공연을 하였다. 11월 영화 「그대와 나」 시사회에서 「화랑의 춤」 등을 공연하였다. 일본의 전통 예능인 노[能]·가부키[歌舞伎] 등에서 소재를 얻어 「부콘[武魂]」·「오이와케[追分]」·「이케니에[生贄]」·「시즈고젠[靜御前]」 등을 발표하였다. 북한으로 넘어간 이후 평양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반야월성곡」·「춘향전」 등 2편의 무용극과 소품 「노사공」 1편을 공연하였다.

묘소

북한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최승희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최승희는 1967년 부르조아 및 수정주의자라는 명목하에 숙청당하면서 최승희와 가족 모두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가 2003년 인민배우로 명예회복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참고문헌
  • 조동화, 『신무용40년사』(성영문화사, 1962)
  • 안제승, 『한국신무용사』(승리문화사, 1984)
  • 최승희, 『불꽃: 1911~1969, 세기의 춤꾼 최승희 자서전』(자음과모음, 2006)
  • 동경원, 「최승희 무용극 연구: 작품 분석 및 공연예술사적 의의를 중심으로」(『한국예술연구』9,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20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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