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타 겐지로

원어 항목명 永田絃次郞
한자 永田絃次郞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9년
몰년 시기/일시 1985년
원어 항목명 永田絃次郞
성격 성악가
성별
정의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 재일 조선인 테너 성악가.

개설

나가타 겐지로는 1909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성악가로 본명은 김영길(金永吉)이다.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야마학교 군악대에 합격해 클라리넷을 전공하였다. 김영길은 일본인 성악가에게 지도를 받고 1933년 시사신보사가 주최한 음악 콩쿠르에서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郎]라는 이름으로 입선하였다.

활동 사항

나가타 겐지로는 1933년 일본의 킹레코드에서 음반을 발매하였고, 1934년과 1935년 독창회를 열었다. 1936년 오페라 「나비 부인」의 주요 역할에 지명되기도 하면서 유명해졌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폴리돌음반에서 「국경의 밤」을 냈고, 1935년 「타관 천리」·「사비수의 처녀」·「내 고향」·「봄나비」 등을 출반하였다. 중일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군가를 많이 불러 인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1941년 내선일체를 강조한 작품 「너와 나」에서 주요 배역을 맡아 출연하는 등 친일 행각을 지적받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에서 어머니를 잃은 후 일본에서 이루어진 귀국 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조선노동당의 간부 앞에서 「오솔레미오」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자본주의자로 비판받았다. 또한 일본으로 아내와 자녀를 돌려보내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가가 모두 처형당하였다는 설이 유력하였다.

묘소

나가타 겐지로와 관련해서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나가타 겐지로는 명예 회복에 성공하여 75세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또한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도 현재 북한의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강철환, 「거대한 사기극에 희생당한 북송 재일 교포」(『KEYS』32, 200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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