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西宮·甲陽園地下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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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宮·甲陽園地下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원어 항목명 | 西宮·甲陽園地下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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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고요엔 일대에 재일 조선인의 노동력으로 건설된 군용 지하 시설물.
니시노미야시[西宮]는 원래 전쟁 이전에 대표적인 주택가였고 오사카[大阪] 상인이 소유한 리조트 지역이었다. 다이쇼[大正]기에 해수욕장으로 개발되고 인근 지역에 온천이 나와서 관광지로 번영하였다. 고요엔은 영화 스튜디오와 유원지로 조성되어 오사카와 고베[神戶] 시민들이 휴양지로 번성하였다. 현재도 고급 주택가이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군기의 공습이 심해지는 가운데 관서 지역에 다수의 지하 공장이 조성되었는데, 고요엔도 지하 공장으로 조성되었다. 전쟁 시기 니시노미야시에는 가와니시 항공기[川西航空機][현재 신메이와 공업[新明和工業]]가 오사카만에 있는 나루오하마[鳴尾浜]에 공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 가와사키[川崎] 제철과 요시하라[吉原] 제유 등 여러 기업이 밀집되어 있었다. 특히 가와니시 항공기는 수상 비행기 제작 공장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한 후 1944년 해군이 접수해 군수 공장으로 전환하여 전투기 ‘시덴카이[紫電改]’를 제작하였다. 1944년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고 일본 국내의 군수 공장이 미군 B-29기를 비롯한 폭격기 전략 폭격 대상이 되어, 니시노미야시의 가와니시 항공기도 표적이 되자 고요엔을 비롯한 여러 곳에 분산 공장을 만들어 조업하기로 하였다. 또한 ‘본토 결전 체제’ 속에서 오사카 해군 경비부[사령부와 통신 기지]를 소개(疏開)하기 위한 군용 지하 시설 구축 필요성이 높아지자 고요엔에 군용 지하 시설을 만들었다.
일본 효고현[兵庫縣] 니시노미야시[西宮市] 고요엔[甲陽園] 일대에 지하호가 있다.
일본 패전 후 고베 지역에 연합군이 주둔할 때, 고요엔에도 2개월간 연합군이 주둔한 적이 있다. 이 당시 1개의 터널을 조사해서 터널 안에 있었던 기재를 모두 반출하기도 하였다. 지하호는 고요엔 니시야마초[西山町]에서 산노초[山王町], 히노데초[日之出町], 신코요초[新甲陽町], 히가시야마초[東山町]의 7곳에 독립된 터널군(群)으로 이루어졌다. 니시노미야 고요엔 지하호 건설 공사는 5개 토건 회사가 공사를 담당했다. 노동력의 주력은 강제 동원된 조선인을 포함한 수백 명의 조선인이었다. 정홍영은 약 500명으로 추산하였다.
오사카 나카노지마에 있던 통신대 통신 기기 일부를 고요엔에 설치하던 중 패전을 맞았고, 시사(市史)나 시가 보관한 자료에는 고요엔 지하호 유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지하호 터널의 일부가 1970년대 신간센[新幹線] 공사 당시 굴착 작업으로 낙반 훼손이 일어난 정도만 기록되었을 뿐이다. 고요엔 지하호 유적은 효고 조선관계연구회 회원인 정홍영(鄭鴻永)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렸다. 이후 효고 조선관계연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현지 조사와 문헌 조사를 통해 공장 배치도와 일부 터널 내부를 확인하였다. 특히 1987년 11월에 정홍영이 발견한 4호 터널에는 ‘조선국 독립’, ‘초록의 봄’이라는 낙서가 남겨져 있었다. 이미 미국 전략 폭격 보고서에 기재되었던 6·7호 터널에 대해서는 1988년 전략 폭격 보고서의 원 자료가 미국에서 발견되었을 때 「NHK 뉴스」[1988. 4. 22]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효고 조선관계연구회는 지하호 조사 외에 시 당국에 지하호 보존과 방재(防災) 대책, 시사 기록 남기기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니시노미야시는 지하호 위에 있는 공원에 ‘제2차 대전 시 고요엔 지하호 터’라는 목석을 세워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