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旧長崎刑務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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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崎刑務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일본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노나카정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현 소재지 | 일본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오가와마치 1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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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일본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노나카쵸 648-5 |
원어 항목명 | 旧長崎刑務所 |
원어 주소 | 日本国長崎県諫早市野中町648-5 |
영문 주소 | 648-5 Nonakamachi Isahaya-shi, Nagasaki-ken |
양식 | 서양식 |
일본 나가사키현에 있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수감하였던 시설.
일제 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국외에서도 활동하였고,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에 있는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대표적인 형무소가 도쿄 스가모형무소[巢鴨刑務所], 나가사키 형무소[長崎刑務所], 가고시마 형무소[鹿兒島刑務所] 등이다.
나가사키 형무소에는 백정기, 이강훈, 김익상 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백정기와 이강훈은 1931년 원심창 등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흑색 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일제 주요 공관과 인물에 대한 파괴 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34년 3월 17일에 주중일본영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일본 정치인, 군인, 친일 중국인 등이 육삼정(六三亭)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처단하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하였다. 백정기는 1933년 11월 15일 나가사키 지방 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나가사키 형무소 제2사에서 수형 생활 중 1934년 6월 5일 옥중 순국하였다. 이강훈은 15년 형을 받아 1940년 7월까지 나가사키 형무소 제4사 제7호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이강훈은 1942년 구마모토 형무소[熊本刑務所]에서 만기 출옥하였으나 도쿄 도요타마 예방 구금소[豊多摩豫防拘禁所]로 이감되어 있다가 해방 후 석방되었다. 김익상은 1921년 9월 12일에 조선 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1922년 2월 상하이[上海]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2년 2월 28일 오성륜과 함께 일본 전 육군 대신 다나카 유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잡혀 1922년 5월 5일에 나가사키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나가사키 형무소 카타후치지소[片淵支所]에 수감 중 1924년 1월에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으나 옥중 순국하였다. 이외에도 조선 의용군의 마지막 분대장으로 알려진 김학철이 수감 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이사하야시[諫早市] 노나카정[野中町] 508-8번지에 있다.
메이지[明治] 5대 감옥[치바 감옥, 가나자와 감옥, 나라 감옥, 나가사키 감옥, 가고시마 감옥]의 하나이다. 메이지 정부가 치외법권 철폐에 있어서 외국에서 현대 감옥 정비의 요구에 부응하여 국가의 위신을 걸쳐 건축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1년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부터 형무소로 사용하였으며, 형무소 구조는 서대문 형무소의 구조와 유사한 판옵티콘(Panopticon)방식으로 되어 있다.
설계자는 법무부의 기술자였던 야마시타[山下啓次郎]이다. 정문에는 개구부에 석재와 벽돌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처마 밑에는 작은 아치가 이어지는 롬바르도 장식 등 뛰어난 구조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