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원어 항목명 韓国人原爆犧牲者慰霊碑
한자 韓國人原爆犧牲者慰靈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나카구 나카지마정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70년 4월 10일
원어 항목명 韓国人原爆犧牲者慰霊碑
원어 주소 日本国廣島県廣島市中區中島町1 平和公園內
영문 주소 Hiroshima-ken, Hiroshima-shi, Naka-ku, Nakajimachō, 1-1
GPS 좌표 https://www.google.co.kr/maps/place/%ED%9E%88%EB%A1%9C%EC%8B%9C%EB%A7%88+%ED%8F%89%ED%99%94%EA%B8%B0%EB%85%90%EA%B3%B5%EC%9B%90/@34.3921459,132.4506375,715m/data=!3m1!1e3!4m8!1m2!2m1!1z5buj5bO257ijIOW7o-WztuW4giDkuK3ljYAg5Lit5bO255S677yRIOW5s-WSjOWFrOWckuWFpw!3m4!1s0x0:0xe129ced5b9751665!8m2!3d34.3927893!4d132.4524942
성격 위령비
관련 인물 장태희
재질 대리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높이 5m
정의

1970년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 건립된 원폭으로 희생당한 한국인을 기리는 위령비.

개설

일본 패전 당시 히로시마에는 강제 동원 노동자를 포함하여 약 14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72년에 한국의 원폭 피해자 협회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총 5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하였고 그 중에 3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생존자 2만 명 가운데 1만 5천 명이 귀국하였고, 5천 명 정도는 일본에 잔류하였다. 1967년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 협회’가 결성된 후 지속적으로 일본 정부에 대해 치료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1970년 4월에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건립 경위

1967년 원폭 피해자 윤병도(尹炳道)를 중심으로 히로시마에 거주하는 재일 한인들이 히로시마 시장에게 위령비 건립 계획을 제출하였고 호의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이에 따라 ‘히로시마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건립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당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지부 단장 장태희(張泰熙)를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위령비 건립 사업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건립하기를 희망했으나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이미 각종 위령비와 기념비가 많이 때문에 더 이상 허가할 수 없다고 하는 행정 답변을 받았다. 부득이 히로시마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건립 위원회는 히로시마 평화공원 바깥에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건립 재원은 재일 한인의 모금을 통해 약 250만 엔을 마련하였고, 1970년 4월 10일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위치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는 히로시마현[廣島縣] 히로시마시[廣島市] 나카구[中區]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있다.

형태

검은색 대리석 비석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 5m, 무게 10톤으로 전형적인 한국식 비석이다. 거북이 모양을 한 받침대 위에 석주를 세웠으며, 그 위에는 쌍용 모양을 새긴 석관이 올려져 있다.

금석문

앞면에는 한국식 한자로 ‘한국인 원폭희생자위령비’가 새겨 있고 비석 뒷면에는 한글로 ‘위령비의 유래’가 적혀 있다. ‘위령비의 유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히로시마에는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학도 일반 시민으로 살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의 원폭 투하로 인해 2만여 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히로시마 시민 20만 희생자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 수는 묵과할 수 없는 숫자이다(후략)”라고 되어 있다.

현황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건립 이후 재일 한인과 일본인 시민 단체가 나서서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으로 이관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다. 1998년 12월에 히로시마 시당국으로부터 이전 승인을 얻어냈다. 이에 따라 공사를 위하여 재일 한인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에 들어갔고, 1999년 5월 21일에 기공식을 거쳐 7월 21일 히로시마 평화 공원 안으로 이전 설치되었다. 한편 나가사키[長崎市] 평화공원에는 1979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원폭으로 죽음을 당한 조선인을 위하여 일본인이 속죄의 마음을 담아” 건립한 조선인 피폭자 추도비가 있으며, 매년 8월 9일 아침 7시 반부터 조선인 피폭자 추도비 앞에서 추도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70년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건립 이후 매년 8월 5일에 한국인 희생자 위령제가 열리고 있으며, 재일 한인 피폭 희생자를 추도하는 대표적인 행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 이치바 준코, 『한국의 히로시마: 20세기 백년의 분노,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누구인가』(이제수 옮김, 역사비평사, 2003)
  • 허광무,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에 대한 진상조사: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를 중심으로』(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1)
  • 허광무, 『히로시마 이야기: 조선인 징용공, 그리고 원폭』(선인, 2013)
  • 「반쪽난 히로시마 위령비를 아십니까」(『한겨레21』674, 2007. 8. 23)
  • 「일본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건립에도 슬픈 역사가…」(『한겨레』, 2016. 5. 12)
  • 『朝鮮人被爆者の實態報告書』(廣島·長崎朝鮮人被爆者實態調査團事務局, 1979)
  • 『白いチョゴリの被爆者』(勞働旬報社, 1979)
  • 朴寿南, 『もうひとつのヒロシマ: 朝鮮人韓國人被爆者の証言』(舎廊房出版部, 1982)
  • 香椎羊雪, 『韓國人被爆者』(近代文藝社,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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