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長生炭鉱水没事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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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生炭鑛水没事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요시키군 니시기와촌 도코나미 |
시대 | 현대/현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2년 2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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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3년 2월 2일 |
발생|시작 장소 |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요시키군 니시기와촌 도코나미 |
원어 항목명 | 長生炭鉱水没事故 |
1942년 2월 3일 일본 야마구치현에 있는 탄광에서 재일 조선인 포함 다수의 탄광부가 사망한 대형 수몰 사고.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는 일본 야마구치[山口]의 탄광에서 1942년 2월 3일 오전 10시 채탄 작업에 투입된 탄광부 183명[재일 조선인 노동자 130여 명 포함]이 갱내 침수로 인해 사망한 대형 탄광 사고이다.
조세이 탄광[長生炭鑛]은 야마구치현 우베[宇部]시 요시키[吉敷]군 니시기와[西岐波]촌 도코나미[床波]에 있는 중소 규모의 탄광이다. 야마구치 탄전은 우베[宇部] 탄전, 오미네[大嶺] 탄전, 쓰부타[津布田] 탄전을 총칭하는데, 이 가운데 규모와 생산 면에서 우베 탄전이 단연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1940년 당시 우베 탄전 소속 탄광은 59개로 야마구치 탄전 가운데 최다를 기록하였다. 우베 탄전 생산량의 9할은 해저 탄광이 점유하였다.
조세이 탄광은 1914년에 우베 해저 탄광으로 채굴권을 획득[등록 번호 404호]하고 개광했으나 8년 후인 1922년 5월에 해저 수몰로 휴업 상태에 들어갔다가 1932년 11월에 본갱을 개광하면서 다시 채탄 작업을 시작하였다. 개광할 당시에는 야마다 신마쓰[山田新松]가 경영자였는데, 이후 라이손 후치노스케[賴尊淵之助]와 공동 경영하다가 1940년대에는 라이손 후치노스케의 아들인 라이손 하야타[賴尊準太]가 독자적으로 경영하였다. 우베 탄전 출탄량 통계에 의하면, 조세이 탄광은 1941년에 정점에 달하며 우베 해저 탄광 가운데 제3위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수몰 사고를 계기로 1942년 산출량은 전해 대비 1/7 수준으로 급감해 저조한 출탄량을 나타냈다.
1942년 2월 3일 오전 10시에 갑작스런 갱내 침수로 수몰 사고가 발생해 조선인 노동자 130여 명을 포함한 탄광부 183명이 사망하자 본갱을 폐쇄하고, 같은 해인 1942년 6월에 도고[東鄕] 탄광 채굴지를 매수해 제2갱을 개광하였다. 1942년 11월에 본갱 서쪽에 제3갱을 개광했으나 직접 운영하지 않고 임대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몰 사고 이후 2갱과 3갱의 순으로 경영의 중심을 옮겨가다가 1945년 패전과 동시에 폐광하였다.
1939년부터 조세이 탄광에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조세이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동원 계획 수는 1939년에 450명, 1940년 800명, 1941년 380명 등 총 1630명이었고, 실제 동원된 인원은 1941년 기준 1,258명으로 우베 탄전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였다. 조세이 탄광의 규모를 감안할 때 노동력 가운데 조선인 비율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현지에서 조세이 탄광을 ‘조선 탄광’이라고 부를 정도로 조선인 채탄부 비율이 높았다. 그 이유는 노동 조건이 가혹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이전부터 많은 탈출자가 속출하였고, 탈출자의 입을 통해 탄광의 실태가 널리 알려져 일본인들이 꺼리는 탄광이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 문서에 의하면, 1,258명의 조선인 노무자들은 1939년 10월 12일부터 1941년 10월까지 14차례로 나뉘어 동원되었다. 경상북도 군위군과 영덕군·영천군, 경상남도 사천군과 고성군, 충청남도 당진군 출신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이들 지역은 1938년과 1939년에 한발의 피해가 극심한 지역이었으므로 조선 총독부가 할당 지역을 선정할 때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많은 수는 1939년 10월 12일에 탄광에 도착한 249명이고, 가장 적은 수는 1941년 4월 13일에 동원된 16명이다.
탄광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4일 동안 견습 기간을 거친 후 채탄 작업에 투입되었는데, 첫 3개월 동안은 보조 작업을 하였다. 채탄부는 2교대 12시간을 근무하였고, 굴진부와 기술과는 3교대 근무였는데, 조선인 노무자들은 대부분 채탄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12시간을 근무하였다. 조선인들은 전원 기숙사에서 도리시마리라 불리는 감독관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었고, 도리시마리에 의한 구타도 일상적이었다.
조세이 탄광은 해저 탄광이어서 평소에도 담수와 해수가 배어 나와 이를 제거하기 위해 갱내에 모터 펌프를 비치하고 365일 24시간 가동하고 있었다. 본갱에는 이미 1941년 11월 30일에 갱내 출수가 발생한 적이 있었고, 갱내 출수로 인한 조업 중지 조치가 여러 번 있었다. 생존자 구술에 의하면 수몰 사고 발생 3~4일 전에도 사고 지점에서 감시원 2명이 상주하며 누수 정도를 점검하였다고 한다. 갱내 상황을 기록한 탄광 일지에 의하면 1941년 2월 1일과 2일에 사고 지점에서 출수를 발견하였다. 회사 측은 사전에 사고 발생 위험성을 인지했으나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결과 대형 참사를 맞았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 30분경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본갱[제1갱] 약 1,000m 지점에서 갱내로 해수가 침투하기 시작해 순식간에 갱 전체가 해수에 잠겨 10시경에는 작업 중이던 탄부 183명이 모두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사고가 나자 회사 측은 구조에 나서지 않고 본갱을 폐쇄하여 사망자를 수장해 버렸다. 사망자들의 제적부 기록에는 사망 일시가 10시로 기재되어 있다.
사고 원인은 ‘버팀목의 지나친 제거[炭柱拂過]’와 채탄을 규제한 지역에서 채탄한 지나친 남굴(拂掘)이었다. 야마구치현 탄광 업무를 관장하던 후쿠오카[福岡] 광산 감독서는 1905년에 이미 지나친 남굴을 금지하였다. 1905년에 미이케 탄광에서 두 차례에 걸쳐 해수 침수 사고가 발생하자 후쿠오카 광산 감독서는 최초로 해저 채굴 제한을 전달하고 5단층 120척[36m]과 대파층(大派層) 200척[60m] 이내 채굴 금지, 불굴 절대 금지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조세이 탄광은 남굴을 하고, 채굴 금지 규정마저 어겼다. 이 같이 규정은 있었으나 당시 당국의 무리한 출탄량 요구와 조업 장려 정책 추진으로 인해 탄광 감독서가 관리를 소홀히 하는 상황이 만연되어 있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회사 측은 경찰과 직원을 동원해 가족들의 접근을 막고 곧바로 두꺼운 널빤지로 본갱을 막았다. 회사 측은 해수가 마을까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하였다. 그 후 다다미와 시멘트 등을 배로 운반해 본갱에 쏟아 부어 본갱 침수를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침수되어 본갱은 폐쇄되었다.
사망자 가족에 대해서는 3일 후 위패를 마련해 소정의 위로금과 함께 유족에게 나누어주며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위패를 급조하는 과정에서 인명의 오기와 누락자가 발생하였다. 위로 금액은 알 수 없으나 탄부별로 차등 지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고 발생 후 회사 차원의 원인 규명이나 책임자 및 관계자 처벌 등 조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식 집계한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사망자는 총 183명이다. 이 가운데 조선인 사망자 수는 130명으로 알려져 있다. 순직 산업인 명부(殉職産業人名簿), 사이코지[西光寺] 위패, 집단 도항 조선인 유부 기록(集團渡航朝鮮人有付記錄) 등 여러 자료를 통해 135~136명으로 추산한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對日抗爭期強制動員被害調査及國外強制動員犧牲者等支援委員會)는 사망자 수를 136명으로 추산하고, 그 가운데 134명의 신상을 확인하였다.
위원회 조사 결과에 의하면, 134명은 충청남도 출신 8명, 전라남북도 출신 7명, 경상남도 32명, 경상북도 68명, 기타 19명이다. 연령별로는 20대가 73명으로 가장 많고 30대가 29명, 40대가 24명, 10대와 50대가 각각 4명이다.
탄광 사무소가 있던 곳 앞에는 우베시 탄광 관계자가 건립한 위령비[長生炭鑛殉難者之碑]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에는 “영원히 잠들라, 편안하게 잠들라, 탄광의 사나이들이여.”라는 글귀가 있을 뿐 조선인 사망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일본 시민들은 1991년 3월 8일 ‘조세이 탄광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을 만들어 추도식 거행은 물론, 사고 원인 규명과 사망자 신상 확인, 추도비 건립을 위해 노력해 왔다. 유족들도 1992년에 조세이 탄광 유족회를 조직하고 매년 바닷가 앞에서 추도식을 거행하며 추도비 건립을 염원하였다. 오랜 노력 끝에 2013년 2월 2일에 조선인 134명의 본명을 포함한 183명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