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노가와 조선인학살사건

원어 항목명 信濃川朝鮮人虐殺事件
한자 信濃川朝鮮人虐殺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일본 니가타현 시나노가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2년 7월
발생|시작 장소 일본 니가타현 시나노가와
원어 항목명 信濃川朝鮮人虐殺事件
정의

1920년대 초 일본 니가타현 시나노가와 소재 신에츠 전력주식회사 수력 발전소 공사장에서 일어난 재일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신에츠전력주식회사[信越電力株式會社]는 니가타현[新潟] 시나노강[信濃川]에서 조선인 노동자 600명, 일본인 노동자 600명 등 총 1,200명의 노동자를 동원해 8개년 계획으로 동양 최대의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었다. 1922년 7월 말경 여러 차례에 걸쳐 강물에 조선인 노동자의 시체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관할 나카우오누마군[中魚沼郡] 도카마치[十日町] 경찰서가 조사를 하였다. 1922년 7월에 일본 니가타현과 나가노[長野]현을 흐르는 367㎞에 이르는 시나노강 상류에서 발견된 시신은 신에츠전력주식회사에서 건설 중인 니이가타현 수력 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시신이었다. 이 사실이 당시 『요미우리 신문[讀賣新聞]』에 게재되면서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경과

발견된 시신은 나카우오누마군 아키나리무라[秋成村]의 공사장에서 강제 노동의 고역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다가 적발된 조선인 노동자를 여러 노동자가 보는 앞에서 권총으로 쏘아 죽인 후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이었다. 1922년 7월말 경찰서에서 이 사건을 조사할 때, 살해된 조선인 노동자는 수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사가 거듭되면서 사망자 수는 점점 늘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조선 총독부 경무국은 기사를 보도한 『동아일보』의 발매를 금지하고 신문에 보도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강변하였다.

1922년 8월 5일에 조선 청년회연합회·신생활사·개벽사·조선 교육협회를 비롯한 각 단체 대표 50여 명이 경성부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니카타현 조선인학살사건조사회를 조직하고 진상 조사에 착수함으로써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조사회는 박희도(朴熙道) 외 9명으로 실행 위원을 선정하고 1922년 8월 7일에 조사 위원 나경석(羅景錫)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서울 청년회에서는 김사국(金思國)을 파견하였다. 도쿄 유학생들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과 김약수(金若水)를 사건 조사 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이 조사 위원들은 국내에서 급파된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과 함께 현지로 갔다. 그런데 요미우리 특파원이 조선인에게는 말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고 일본인들은 이 사건이 한국의 독립 시위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전위(前衛)』 1922년 9월호가 「일선(日鮮) 노동자의 단결」이란 논문을 게재해 한인 노동자를 적극 옹호하면서 한인 유학생들의 마음을 얻었다. 「일선 노동자의 단결」 논문은 “일본 노동자와 조선 노동자의 제휴”를 주장하고 “조선인 노동자의 조합 결성”과 “조선인에게만 가해지는 특수 대우를 철폐하고 동일 노동에는 동일한 임금을 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결과

다각적인 조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의 조선인이 학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현지 조사는 종료되었다. 조선인 사망자는 100여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러한 현지 조사 결과는 진상 조사 보고회나 연설회를 통해 일본 지역과 국내의 조선인들에게 알려졌다. 시나노가와 조선인학살사건으로 인해 일본 지역에서 조선인은 조선인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조선인 노동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前衛』(日本共産黨, 1922. 9)
  • 朴慶植, 『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未來社,1965)
  • 佐藤泰治, 「新潟県中津川朝鮮人虐殺事件」(『在日朝鮮人史硏究』15, 1985)
  • 『동아일보』(1922. 8. 7, 19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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