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岸和田紡績争議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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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岸和田紡績爭議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0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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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岸和田紡績争議事件 |
성격 | 노동 쟁의 |
관련 인물/단체 | 기시와타 방적주식회사 |
1930년 일본 기시와타 방적회사의 일본인 노동자와 재일 조선인 노동자가 파업을 하여 검거, 기소된 사건.
1930년 5월에 일본 기시와타[岸和田] 방적주식회사에서 일본인, 재일 조선인 노동자 200여 명이 파업을 하여 검거, 기소된 사건이다. 오사카[大阪]·센슈[泉州] 지방의 최대의 방적 자본이었던 기시와타 방적주식회사에서는 1918년부터 조선인 여성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1892년에 창립된 기시와타 방적주식회사는 1923년에 자본금은 975만 엔, 직공은 총 6,210명에 달하였다. 대쟁의가 일어난 1930년에는 본사 공장 외에 사카이[堺]·노무라[野村]·하루키[春木]·쓰[津]] 4개 분공장이 조업하고 있었다. 각 공장에 분산 배속된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은 점차 증가하여 1924년에는 남성 61명, 여성 726명이 일하고 있었다.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최초 쟁의는 1922년 7월에 하루키 공장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상반기 상여금이 일본인에 비해 적은 것에 항의해서 직공 271명[남성 52명, 여성 219명] 전원이 파업에 들어갔다. 또 1929년 8월에 본사 공장 파업에는 재일 조선인 여공 약 200명이 참여하였다.
가장 유명한 쟁의는 1930년 사카이 공장에서 발생한 대규모 파업이다. 사카이 공장에서는 1930년 1월 이후 잇따른 임금 인하와 조업 단축으로 노동자의 실수령액은 40%로 삭감되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인 노동자와 재일 조선 노동자 198명은 1930년 5월 3일 파업을 결의하였다. 재일 조선인 여공을 중심으로 약 100명이 공장을 탈출했고, 1930년 5월 4일부터 파업에 돌입하였다.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은 이 쟁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930년 5월 15일 밤에는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의 노동자 100여 명이 사카이 공장을 습격하여 경찰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쟁의단은 난관을 타개하고자 공장 전체에서의 총파업을 계획하고 1930년 5월 27일에는 재일 조선인 자유 노동자 등 30명이 하루키 공장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30년 6월 13일에 파업은 타결되었지만 투쟁은 노동자측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