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東学之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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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之光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창간 시기/일시 | 1927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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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간|종간 시기/일시 | 1933년 11월 |
소장처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88 |
원어 항목명 | 東学之光 |
성격 | 기관지 |
관련 인물 | 김병순|박사직|최광룡|장한섭|김형준|백철|주옥경|이학득|이두성 |
창간인 | 최광룡 |
발행인 | 박사직|김병순|최광룡|이두성 |
판형 | 국판 |
총호수 | 18호 |
1927년 11월 일본의 천도교청년당 도쿄당부에서 발행한 기관지.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 회원들은 방학 때 고국으로 돌아와 전국 순회 강연을 개최하는 한편,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와 『신인간(新人間)』, 종합지 『개벽(開闢)』 등의 잡지에 기고하는 등 국내의 문화 운동을 주도하였다. 천도교청년회는 1923년 9월 2일 천도교청년당으로 개편하였고, 도쿄지회는 1927년 8월 17일 천도교청년당 도쿄부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11월 천도교청년당의 주의와 천도교의 진리를 선전하며 천도교청년당의 각부 사업 상황과 필요 학술 등을 소개하기 위해 『동학지광』을 창간하였다.
『동학지광』의 판형은 국판이며, 국한문 혼용체였다.
『동학지광』의 주요 내용은 천도교와 관련된 종교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농민 운동과 청년 운동 등 천도교 부문 운동과 관련된 것 이외에도 민족 운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1929년 12월 발행된 『동학지광』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비타협(非妥協)」, 「소파 방정환씨(小波 方定煥氏)를 환영(歡迎)함」이 나오고, 운소(雲巢)의 「칠십년(七十年)의 연보(年譜)」, 김형준(金亨俊)의 「당부문운동(黨部門運動)의 성질(性質)에 대(對)하여-시(時)에 농민부 문제(農民部 問題)를 논(論)함-」, 박사직의 「오관소연(五款小演)」, 김병순의 「주의생활(主義生活)의 인간적 가치(人間的 價値)」, 최광룡의 「의식적 사회 생활(意識的 社會生活)」, 장원준(張元俊)의 「우리 농민(農民)은 어데로」, 고가사인(高可寺人)의 「원장(院長) 박사직(朴思稷) 선생(先生)을 송(送)함」, 이학득(李鶴得)의 「도쿄[東京]을 떠나는 감상(感想)」, 백철(白鐵)의 「동덕(同德)이여!」, 이학인(李學仁)의 「나는 님-정박사직(呈朴思稷), 이학득(李鶴得) 양씨(兩氏)에게-」, 유소년(幼少年)의 「문제(問題) 강좌(講座)의 대성황(大盛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주씨사모임 귀국(朱氏師母任 歸國)」, 「시보(時報)」, 「선전포덕업(宣傳布德業)에 의연(義捐)을 주신 제씨(諸氏)의 방명록(芳名錄)」 등이 게재되었다.
『동학지광』은 1927년 11월 1일 창간호를 낼 예정이었으나 11월 10일 첫 호를 발행하였다. 창간호 발행인은 최광룡(崔光龍)이었다. 초기에는 등사판으로 부정기 발행되었으나 1929년 9월 동학지광사(東學之光社)를 설립하고 이후 격월간 활판으로 인쇄하였다. 발행소는 창간 당시에는 도쿄 시외의 스가모정[巢鶴町] 미야시다[宮下] 1581번지에 위치한 천도교 도교종리원이었다. 이후 도쿄 다키노가와[瀧野川] 다바타히가시정[田端東町] 800호로 옮겼다. 발행 부수는 1,000부 정도였고, 판매 금액은 1권에 10전[1934년 4월]이었다. 국내에 『동학지광』 지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동학지광』은 18호까지 발행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확인 가능한 것은 8호[1929. 12], 10호[1930. 4], 13호[1930. 10], 18호[1933. 11] 등 4호에 불과하며, 제목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1호[1930. 6]과 12호[1930. 8], 그리고 발행 호수가 불분명한 1931년 8월 발행한 것 등 3호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