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黃人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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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人社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6년 7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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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42년 3월 |
원어 항목명 | 黃人社 |
성격 | 언론사 |
설립자 | 이동화 |
1926년 7월 2일 일본 도쿄에서 이동화의 주도로 내선 융화와 황색 인종의 대단결을 위하여 설립한 친일 언론사.
이동화(李東華)의 주도로 내선 융화와 황색인종의 대단결을 위하여 설립하였다.
강원도 통천 출신의 이동화, 평안도 출신의 김창준(金昌俊), 박봉신(朴奉信) 등이 현정구락부(顯正俱樂部)의 기관지 역할을 한 『황인시론』을 창간한 것은 1923년 4월이었다. 1922년경에 조직된 현정구락부는 일본과 조선의 친선을 목적으로 한 친일 단체로, 구성원이었던 이동화와 김창준의 대립으로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으며, 자금 문제로 『황인시론』도 폐간되었다.
현정구락부 조직의 중심인 이동화는 일본의 니혼[日本] 대학에 재학하던 1920년 8월에 경성일보 후원으로 개최된 도쿄 학생 조선 시찰단 순회 강연회의 연사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1920년 9월에는 내선청년융화회에서도 활동하였다. 현정구락부 활동 이후 이동화는 1925년 4월, 일본인들과 제휴하여 ‘아시아 문화의 작흥 및 민족의 공존 공영’을 내건 민족경애회에도 참가하였으나 별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후 홀로 1926년 7월에 백색 인종에 맞서 황색 인종의 대동 단결을 주장한 황인사(黃人社)를 설립하였다.
황인사는 회원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 아니라 잡지를 발행하기 위한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따라서 회원 수도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무소는 처음에 도쿄의 아카사카구[赤坂区]에 있었는데 이후에 메구로구[目黒区]로 이전하였다. 1927년 당시의 사장은 이동화, 이사장 최상덕(崔相德), 이사 권찬석(權燦錫)이었다. 1932년 12월 16일 황인사는 기관지로 『황인공론』을 창간하였다. 그 외 『국방과 조선인』, 『전시하 우리의 진로』, 『민족 공동 사회의 제창』, 『전시하 근로 필독』 등을 출간하였다. 1942년 3월에 해산 신고서를 제출하고 황인사는 해산하였다.
황인사 창간 이후 1928년 7월 후쿠오카에서 황인사가 주최하고 『규슈일보[九州日報]』, 『후쿠오카 일일신문[福岡日日新聞]』이 후원하는 조선 문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조선 문제 강연회에 이동화, 최상덕, 위춘원(魏春源), 김수홍(金琇洪) 등이 연사로 출연하여 ‘우리의 주장’, ‘합병 전후의 조선 진상’, ‘일본 동포에게 호소한다’ 등의 연설을 하였다. 각각의 활동을 통하여 황인사는 ‘일선일가(日鮮一家)’, ‘신국민주의(新國民主義)’를 주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