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江東橋紹介所登錄労働者協力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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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東橋紹介所登錄勞動者協力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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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일본 도교도 혼조 |
원어 항목명 | 江東橋紹介所登錄労働者協力会 |
성격 | 노동운동단체 |
1933년 일본 도쿄 혼조의 고토바시 노동 중개소를 중심으로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이 조직한 노동 운동 단체.
1932년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로 구성된 공조회에서 출발하여 공조회가 해산된 이후 1933년 9월에 고토바시 소개소등록노동자협력회를 조직하여 일상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사상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분열하였다.
일상 투쟁을 통한 생활 방위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노동 강화 반대, 등록 몰수 및 취로 정지 절대 반대, 하청 제도의 중간 착취 반대 등을 슬로건으로 채택하였다.
1932년 고토바시 노동소개소[江東橋勞動仲介所]에서 알선을 받는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이 공조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말 최두환 등 공조회의 주요 인물이 검거되고 도쿄시 당국이 불량분자 소탕을 내걸면서 공조회의 등록을 취소하고 노동수첩을 압수하는 등의 탄압을 가하면서 조직이 궤멸당하여 해체되었다. 이후 1933년 9월 4일에 아나키스트 계열의 조선 자유노동자조합이 공산주의계열과의 협의 하에 오우영(吳宇榮)을 의장으로 고토바시 소개소등록노동자협력회를 결성하였다. 공산주의계열과 아나키스트계열의 연합 단체라는 점이 특이하기는 하지만 두 세력의 사상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1933년에 의장 오우영이 탈퇴하여 분열하였다.
공산주의계의 노동 운동 단체들이 일본 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해소된 상황에서 고토바시 노동소개소의 조선인 자유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들과 함께 공조회를 결성하여 1932년 3월부터 권익 투쟁을 전개하였다. 공조회는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조선 자유노동자조합, 극동노동조합 등 아나키스트 계열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1933년 고토바시 소개소등록노동자협력회가 결성된 이후에는 일상 투쟁을 통한 생활 방위를 투쟁방침으로 채택하고 노동 강화 반대, 등록 몰수 및 취로 정지 절대 반대, 하청 제도의 중간 착취 반대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투쟁하였다.
재일조선인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로 결성된 공조회가 노동자의 일상 이익을 옹호하는 권익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산된 후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지도를 받았으나 사상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분열하였다. 재일 조선인 노동 운동과 민족 운동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