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広島鮮友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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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島鮮友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히로시마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3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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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30년 |
개칭 시기/일시 | 1929년 11월 |
최초 설립지 | 일본 히로시마현 |
원어 항목명 | 広島鮮友会 |
성격 | 재일조선인 상조단체 |
1923년 혹은 1924년 일본 히로시마현에서 조직되어 1930년대까지 존속한 재일 조선인 상호 부조 단체.
공존 공영의 취지에 기초하여 풍성 도야와 지식 보급을 꾀하면서 교정을 두텁게 해 회원 상호 공제에 힘쓰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23년 11월에 설립되었다는 설과 1924년 5월 4일 설립되었다는 설이 있다. 설립 당시 명칭은 조선인 노우회였으며, 1929년 11월 히로시마 선우회로 개칭하였다. 회장과 부회장 각 1인, 이사, 간사, 고문을 두었다. 회원은 주로 공장 노동자, 판매원, 살수부 등이었으며, 회비는 10전이었다. 1924년 무렵 회원 수는 120명이었고, 회장은 이석규, 부회장은 김흥준이었다. 1925년 3월 임원을 개선하여 회장 이경민, 야학부장 김연창, 소개부장 이재근, 위생부장 이상문이 선임되었다. 1926년 이후 활동이 부진하다가 1929년 히로시마시 사회과의 지원으로 발회식을 다시 하여 재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거주 재일 조선인의 인구가 2,400명을 상회하면서 조선인의 지도 기관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시 당국이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직이 개편되어 조선인은 보통 회원, 조선인 유력자와 일본인 유력자는 찬조 회원이 되었으며, 교육부, 경조 호조부, 강연부, 위안부 등을 설치하였다. 회장과 부회장은 조선인이 되었고, 간사와 고문은 히로시마시의 사회과원과 일반 사회사업가로 선임하였다. 그리하여 회장 이석규, 부회장 이태영 등이 1925년 2월 3일에 선출되었다. 고문에는 히로시마시의 3개 경찰서장과 소학교 교장들이 선임되었다. 1931년 2월에 총회를 열어 회장 이석윤, 부회장 권육주를 선출하였다. 1932년 10월에 히로시마현 내선융화단체연합회가 결성되었을 때 이석규가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히로시마 선우회는 야학의 설치와 운영, 직업소개를 통한 취업의 장려와 취업자의 전업과 근태 감시, 위생 사상의 보급과 회원 및 그 가족의 병자를 치료하고 사망자 유족을 위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야학은 히로시마 선우회가 역점을 둔 사업으로, 히로시마 고등 사범 학교에 재학하는 유학생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조선어, 일본어, 산술 등을 교수하였다. 1925년에는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일제의 내선융화 방침을 일방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 재일 조선인 노동자 700여 명을 모아 애도식을 개최하였고, 1927년에는 히로시마 선우회의 회장 이석규가 순종 붕어 1주기 추도식을 주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