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조선인연맹

원어 항목명 関西朝鮮人連盟
한자 關西朝鮮人聯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오사카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8년
원어 항목명 関西朝鮮人連盟
정의

1928년 일본 오사카부에서 조직된 재일 조선인 차별 철폐 운동 단체.

개설

간사이 조선인연맹은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아나키즘 계열에서 조직한 단체로 일본의 수평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설립 목적

간사이 조선인연맹의 강령은 스스로의 행동으로 해방을 쟁취할 것, 경제와 직업의 자유를 요구할 것, 차별하는 자를 철저히 규탄할 것 등 수평사의 강령을 대부분 답습하면서 “우리는 조선 독립운동과는 교섭이 없고 전념으로 인류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매진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독립운동과는 선을 그었다. 착취 제도가 온전한 독립 국가의 수립이 목적이 아니라고 보았다.

변천

간사이 조선인연맹은 1922년 12월 6일 조선인협회장 이선홍과 아나키스트 최명선이 기모토 쇼타네[木本正胤], 기모토 본진[木本凡人], 요네다 도미[米田富], 이즈미노 리키조[泉野利喜藏] 등 수평사 계열의 지원을 받아 조직하였다. 1924년 이후 최선명조선 무산자사회연맹을 조직하고 활동의 근거지를 옮기면서 간사이 조선인연맹은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간사이 조선인연맹은 1923년 4월 기관지 『신선일보(新鮮日報)』를 일간으로 창간하였다. 책임자로 조선인협회의 총무 김동혁을 선임하고 4월 23일 창간호를 발간하였으나 발간사의 일부 내용이 질서를 문란시킨다며 발매 금지를 당하였다. 이후 기관지는 속간되지 못하였다. 1924년 3월 전국수평사 제3회 대회에서 조선의 형평 운동과 연락한다는 결의에 따라 간사이 조선인연맹최선명이 수평사와 형평사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수행하였다. 최선명은 대회 직전 발생한 일제 경찰의 이선홍 구타 사건에 대한 항의를 위해 도쿄에서 고위 관계자를 만나고 돌아와 간사이 조선인연맹에 보고하였다. 1924년 4월 9일 최선명간사이 조선인연맹과 수평사의 지원을 받아 제주도민대회를 개최하였다. 1924년 5월 대지진피학살조선인의 추도를 겸해 도쿄 교섭에 관한 보고 연설회를 개최하여 조선인 학살의 진상 발표, 조선인 노동자의 구제 정책 확립, 경찰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적 취급 철폐 등을 요구하고자 하였으나 연설회가 개최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미국 의회에서 일본이민배척법을 심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평사는 이에 반발하면서 일본 내의 조선인과 부락민의 차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임시 대회를 1924년 4월 27일 개최하였다.

의의와 평가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철폐만이 아니라 일본 내의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활동하였다는 측면에서 국제주의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조국 독립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외면하였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지적된다.

참고문헌
  • 김동명 외, 『일제 강점기 재일 조선인 단체 편람』(민족문제연구소, 2010)
  • 塚崎昌之, 「大阪における内鮮融化時代の開始と内容の再検討」(『在日朝鮮人史硏究』37, 在日朝鮮人運動史硏究會, 2007)
  • 塚崎昌之, 「水平社·衡平社との交流を進めた在阪朝鮮人アナ系の人々の活動を中心に」7(『水平社博物館硏究紀要』9, 水平社博物館,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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