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

원어 항목명 大朝鮮人日本留学生親睦会
한자 大朝鮮人日本留學生親睦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도쿄도  
시대 근대/개항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895년 5월 12일
개칭 시기/일시 1898년 9월
원어 항목명 大朝鮮人日本留学生親睦会
성격 유학생 친목단체
정의

1895년 5월 일본 도쿄도에서 조선 관비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최초의 유학생 친목 단체.

개설

1895년 일본 도쿄도에서 조선의 관비 유학생이 결성한 최초의 일본 유학생 친목 단체이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윤치오, 어윤적, 이병무, 박희병 등이 새로 온 관비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을 계기로 결성하였다.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 회원들은 일본의 유명 유적지와 박물관, 사철, 신사와 신궁 등을 견학하고 사법성, 문부성, 대장성 등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사격 훈련을 받고, 병사 잡지를 구독하는 등 군사 훈련을 하였고, 정치, 법률, 경제, 만국군제, 경무, 감옥 제도, 교통, 동양 문제 등을 주제로 한 강화회 등을 열었다.

변천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는 1898년 회원 사이의 불화가 지속되어 9월 제국청년회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는 기관지로 계간 『친목회 회보』를 발간하였다. 회보의 구성은 사설, 논설, 문원(文苑), 강연, 내외보, 만국사보, 잡보, 회중 기사 등으로 이루어졌고, 회원과 찬성원 외 국내 각 학교와 정부 기관으로 보냈다. 『친목회 회보』는 6호까지 발행하였다. 회보에 따르면 친목회는 외방에서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연마해 국가 정치의 동량이자 문명 개척의 주도자인 유학생들이 서로 보도(補導)하기 위해 조직하였다고 한다. 임원으로는 회장, 부회장 외 평의원, 간사, 회계, 간첨, 간지, 간독을 두었다. 윤치오는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귀국으로 인해 부회장인 어윤적이 회장 자리에 올랐다. 1897년 전태흥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내부에 이견이 있어 조제환이 선출되었다. 1895년 10월 회원 수는 186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명성 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40여 명이 집단으로 귀국하였다. 아관파천 뒤에는 전 회원이 정과(停課)를 결의하였다. 이런 행동은 유학생들이 지닌 반일 의식과 존왕 의식 면모를 반영하고 있다.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는 1897년 11월 회원 수가 70여 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 회원들은 회보에서 밝힌 바처럼 지식을 연마해 국가 정치의 동량이 되기 위한 선진 문물과 과학 기술을 습득하여 본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 회원들은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의 창설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아 일본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김동명 외, 『일제 강점기 재일 조선인 단체 편람』(민족문제연구소, 2010)
  • 김상기, 「한말 태극학회의 사상과 활동」(『교남사학』1, 영남대학교 국사학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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