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학도의용군

원어 항목명 在日学徒義勇軍
한자 在日學徒義勇軍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이후
해체 시기/일시 1951년 3월 중순 이후
원어 항목명 在日学徒義勇軍
정의

한국 전쟁 때 참전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계 재일 한인 의용군.

개설

해방 직후 일본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던 유학생이나 재일 한인 학생들은 학교 생활 불안 및 동요 방지, 귀국 및 잔류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학생들의 단결을 목적으로 재일조선인학생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재일조선인학생동맹은 조국의 정치 정세의 영향으로 내부 대립이 격화되고 분열이 계속되어 자유민주파 학생들이 재일학생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유학생들 간의 대립과 투쟁의 격화는 1950년 5월 호세이대학[法政大学] 사건으로 번져 메이지대학[明治大学] 학생 이상석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재일학생동맹은 1950년 6월25일 발생한 한국 전쟁의 전황이 불리한 조국을 지원하기 위해 재일한교지원병 임시사무소를 운영하였다. 이들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과 함께 의용군의 모집, 위문품의 지원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재일 한인 학생과 청년들도 이에 호응하여 일본 각지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국 전선에의 참전 의지를 밝힌 청년과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에 몰려와 주일한국대표부와 교섭을 하거나 연합군 사령부에 혈서로서 참전 의지를 보여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재일학도의용군 소속의 애국 학생 642명은 학업과 생업을 포기하고 조국을 위한 참전의 결단을 내렸다.

변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모집되기 시작하여 8월 15일을 전후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입대 허가가 떨어져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연합군에 편입되었다. 한국 정부로부터 의용군 수용 태세의 준비 완료가 떨어지자 대표부 공사가 참석하여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산하 단체와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 결과 조국방위지원군본부를 별도로 설치하고 대표부 공사가 참전의 일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초 한국 전쟁 참전 청년 학도를 위한 참전 행사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한국 전쟁은 한때 부산 교두보만 남겨놓고 한반도가 북한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는 위험에 처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황이 바뀌어 국군과 연합군이 주도권을 되찾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에 의해 다시 후퇴하였다. 1951년 말 전황은 휴전선 근방에서 교착 상태로 안정 상태를 유지하였다. 조국을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 일어선 재일 청년 학도 의용군들은 1951년 3월 중순경부터 연합군 각 부대로부터 제대하기 시작하였고 부산의 소림사에 집결하여 일본 귀환을 기다리게 되었다.

일단 군에서 제대한 의용군들은 일본 귀환자 대기소에 집결하여 정부와 미8군사령부의 알선으로 일본에 점차 귀환하여 귀환자는 265명에 달했다. 그러나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국권을 회복하면서 일본 정부의 입국 허가 거부로 전원이 일본으로 귀환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또한 재일학도의용군 중 일부는 국군에 잔류하여 국방을 위해 유익한 인재로서 계속해서 활약하기를 원했던 청년들도 있었다.

현황

재일학도의용군 642명이 참전하여 전사자 135명, 일본 귀환자 265명, 미귀환자[한국 잔류자] 242명이 발생했다.

의의와 평가

애국 학생들의 한국 전선 출정은 해외 청년 학도들이 조국 전쟁에 참가한 세계 전쟁사의 효시로서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 『재일 동포 6·25 전쟁 참전사』(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2002)
  • 지충남, 「재일 동포 사회의 ‘제3의 민족 통일 운동’ 고찰」(『한국동북아논총』18-4, 한국동북아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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