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朝鮮佛教東京留学生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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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佛敎東京留學生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36년 9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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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42년 12월 |
원어 항목명 | 朝鮮佛教東京留学生会 |
1936년 9월 20일 일본 도쿄도에서 조직되어 활동한 재일 조선인 불교 유학생 단체.
조선불교도쿄유학생회의 강령에서 설립 목적을 “우리는 불타 정신을 체험하며 그 교강(敎綱)을 전승하는 도사(道師)의 실현을 기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 도쿄에 조직된 최초의 불교 유학생 단체는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朝鮮佛敎留學生學友會)였다.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는 3·1 운동 이후 불교 유학생이 늘어나자 1920년 4월 11일 결성되었다. 발기인은 정광진, 엄용신, 김상철, 성기현, 김경주 등이었다.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는 1921년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는 국내 불교 청년 단체와 연계하고 국내 불교계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방학 기간에는 귀국하여 국내 순회 강연을 통해 신지식의 보급과 계몽에 앞장섰다. 기관지 『금강저』를 발간하고 원효대성찬앙회 및 삼장학회 등을 통한 불교 신앙의 대중화를 도모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국내 단체인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이름을 변경하자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지부 동맹인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도쿄동맹으로 변경되었다.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도쿄동맹은 정기 대회, 신입 회원 환영 및 졸업 회원 송별회를 개최하고, 연구 모임 동맹 연구회 활동, 기관지 『금강저』 발간 등 자체적 활동과 더불어 국내 불교계와의 긴밀한 유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 초반부터 등장한 종헌 실행 문제, 사법 개정 운동, 중앙 불전 폐지 문제 등 중요 현안에 대해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였다. 국내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내분과 불화 등 불교청년운동 부진의 영향으로 1934년 봄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도쿄동맹은 해체되었다. 1936년 5월 25일 불교 유학생들은 단체 발기 간담회를 개최하고 결성 준비를 하였으며, 1936년 6월 6일 발기 대회를 거쳐 9월 20일 조선불교도쿄유학생회 창립 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하였다. 창립에 참여한 주요 인물은 김진원, 문록선, 박종운, 조명기, 이부열, 김삼도, 이강우 등 18명이었다. 전시 체제기인 1942년 12월 해체되었다.
조선불교도쿄유학생회는 창립 대회에서 회칙을 마련하고 기관지 『금강저』 속간, 세이도쿠가쿠인[聖德學院] 설립, 남조선 수해 수제, 야유회 개최 등을 의결하였다. 1936년 10월 17일 도쿄 교외에서 야유회를 가졌으며, 『금강저』 속간을 위해 하기 방학을 이용 귀국하여 불교계를 순방하며 발행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 『금강저』는 1937년 1월부터 1943년 1월까지 발행하였다. 매년 1~2월에 정기 총회를 개최하여 제반 사항을 토의 결의하였으며, 집행부와 임원을 선출하였다. 신입 회원 환영회, 졸업생 환송회, 졸업 논문 발표회 등을 가졌으며, 회원의 결속 및 국내 불교계와 유대 강화를 위해 유학생 야유회와 국내 불교 성지 순례 등을 진행하였다. 1930년 중반 이후 전시 체제기가 되면서 기관지 『금강저』의 일본어 발행, 일제의 침략 전쟁 옹호 등 일제에 협력하는 사례도 있었다.
조선불교도쿄유학생회는 국내 불교계를 개혁에 노력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국내 불교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한국 불교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