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원어 항목명 在東京朝鮮留学生学友会
한자 在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도쿄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2년 10월 27일
해체 시기/일시 1931년
원어 항목명 在東京朝鮮留学生学友会
정의

1912년 일본 도쿄도에서 조직된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

설립 목적

재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의 단결과 일상 부조에 목적을 두었다.

변천

1912년 10월 27일 연합친목회의 회의석상에서 연합친목회를 유학생 대표 조직으로 개정하자는 결의에 의해 안재홍(安在鴻), 최한기(崔漢基), 서경묵(徐慶默) 등을 주축으로 재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가 성립되었다. 기독교 청년 회관에 사무소를 두고 기독교청년회와 인원, 재정, 조직적인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재일 한인 유학생뿐만 아니라 재일 한인 전체의 중심적 존재였다. 조직은 서무부, 사교부, 재무부, 변론부, 운동부, 편집부 등으로 구성되었다. 1929년 6월부터는 사교부와 변론부를 폐지하고 정문부와 조직부를 설치하였다.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은 1914년 4월 창간하였으며 1930년 4월 『학지광(學之光)』 29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재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는 표면적으로는 친목 단체였지만 실체는 민족 해방 운동을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집회는 총회, 평의회, 집행위원회 외에도 정기예회, 웅변회, 졸업축하회, 신도래학생환영회, 망년회, 육상대운동회 등이 이루어졌다. 집회를 통해 민족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민족의식과 항일 의식을 증진시켰다. 또한 민족 해방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대표적인 성과가 1919년 재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의 책임의원 선거 명목으로 실행된 2·8 독립 선언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에 의한 간부의 대량 검거, 지부 및 연맹단체의 해체 등으로 인해 1931년 해체되었다. 이후 유학생 운동은 각 학교별 동창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36년 6월 조선유학생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재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는 매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국내 순회 학술 강연단을 조직하고 순회강연을 실시하였다. 배일 독립 정신을 고취함으로써 일제에 의해 강연이 중단되거나 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1927년 이후 국내에서 동맹 휴학 사건이 일어나자, 학우회에서는 재도쿄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의 이름으로 “전 조선 학생은 궐기하라.”라는 격문을 보냈다. 유학생대회를 개최한 뒤 독립운동을 호소하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국내 운동을 지지하였다.

의의와 평가

재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는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이다.

참고문헌
  • 김인덕, 『식민지 시대 재일 조선인 운동 연구』(국학자료원, 1996)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2(三一書房, 1975)
  • 『在留朝鮮人運動』(日本 內務省 警保局, 1976)
  • 金基旺, 「一九二〇年代在日朝鮮留學生の民族運動ー在東京朝鮮留学生學友會を中心にー」(『歴史硏究』34, 大阪教育大學歷史學硏究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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