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無産者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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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産者社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9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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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31년 8월 |
최초 설립지 | 일본 도쿄도 |
원어 항목명 | 無産者社 |
성격 | 출판사|사회단체 |
설립자 | 김두용|이북만 등 |
1929년 일본 도쿄도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계열의 출판사이자 사회 운동 단체.
무산자사는 일제 지배하의 피압박 조선 민족의 문화적 지식 교양을 위한 출판물 발간을 일차적인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다. 설립과 함께 출판된 기관지 『무산자』 창간호에 따르면 설립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금일 우리는 우리의 문화, 우리의 지식이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피압박 계급으로서의 지식이 필요하고, 이것을 무기로 지배 계급과 항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가져야만 할 지식을 얻기 위하여 많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무산자사’는 이런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나왔다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우리 무산자사에서는 금후로 많은 출판물을 내어서 우리 조선 피압박 민족의 정신적 양식을 공급하려 한다.”
무산자사의 주도자들은 대부분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도쿄지부[카프 도쿄지부]의 성원이기도 했으며, 1929년 11월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도쿄지부는 해체를 선언하고 무산자사에 합류하였다.
1930년경에는 무산자사의 임원진이 대폭 개편되었다. 책임 겸 서기국 책임은 김삼규(金三奎), 편집국 책임은 한재덕(韓載德), 조직부 책임은 송연수(宋蓮壽) 등이 맡았다. 이 외에도 실질적인 활동을 위해 지원 조직인 모플[МОПР]과 반제동맹 프락션, 실업동맹 프락션 등을 조직하고 역할 분담을 하였다. 또한 조직부 책임을 중심으로 하여 산하에 각 지구반을 조직하는 활동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한편 1930년 10월에는 기관지 『무산자』의 배포망을 활용하여 무산자사연구회(無産者社硏究會)를 조직하고 고경흠(高景欽)과 김치정(金致禎)이 그 지도를 맡았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1931년 여름 이른바 ‘제1차 카프(KAPF) 검거 사건’이 일어나 무산자사의 핵심 간부와 활동가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조직이 와해되었다. 검거를 피한 김두정, 함용석(咸龍石), 윤기청(尹基淸) 등은 무산자사의 후신으로 ‘노동예술사준비회’를 조직하여 이를 1932년 1월 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로 발전시켰다. 이보다 앞서 1931년 11월 이북만은 김두용, 박정석(朴丁石) 등과 함께 동지사(同志社)를 조직한 바 있다.
1929년 5월 무산자사가 조직되기에 앞서 1929년 4월 주도적 인물들은 “1) 혁명적 노동자, 농민을 광범위하게 조직하여 당을 재건할 것, 2) 무산자사를 당 재건 준비 기관으로 할 것, 3) 선전, 선동 및 조직을 위해 기관지를 발행할 것, 4) 『무산자』를 재건당의 기관지로 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먼저 무산자사를 설립하고 기관지 『무산자』를 발간하고 ‘무산자사 팸플릿’ 등을 발행하여 국내와 일본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러한 출판물 보급 활동 외에도 무산자사는 조직부를 중심으로 산하에 지구반을 조직하는 조직의 확대 강화 활동, 적색구원회(모쁠) 활동, 무산자사연구회 조직 활동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무산자사는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한 1920년대 말에 일본 도쿄에서 조선 민중의 지식 교양과 와해된 조선 공산당의 재건을 위해 조직되어 활동했다. 특히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여 표면으로는 합법적인 출판사를 내걸고 사회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면에서는 비합법 활동을 모색하는 유연한 방식으로 2년 이상 조직을 유지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