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自彊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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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自彊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4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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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42년 이후 |
원어 항목명 | 自彊会 |
성격 | 천도교계 유학생 지원 단체 |
1924년부터 1940년대까지 일본에서 활동했던 천도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학생 지원 단체.
1923년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이 부르짖던 내선 융화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유학생들에 대한 주거 및 경제적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다. 당시 도쿄의 천도교 핵심 인물이었던 민석현(閔奭鉉)과 박사직(朴思稷) 등은 자강회(自強会)를 설립하여 ‘자조적 정신을 함양’하고 ‘천부의 노동력을 조장’하기 위해 최우선 사업으로 노동자 200명, 고학생 50명을 수용가능한 기숙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인근 지역의 일본인 유지인 사카타니 요시로[阪谷芳郎], 시미즈 가즈오[清水一雄] 등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창립 준비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의향에 따라 유학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육영 사업으로 정해지고 명칭도 자강회(自彊会)로 바뀌었다.
‘동포 공영의 안택(同胞共栄の安宅)’, ‘조선 동포의 자조적 정신을 함양하고 정신상, 경제상 및 사회상 지위 향상’ 도모를 목적으로 했다.
1924년 11월 15일 창립된 자강회의 사무소 겸 기숙사에 12명의 유학생이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자강회의 설립 목적은 ‘동포 공영의 안택’, ‘조선 동포의 자조적 정신을 함양하고 정신상, 경제상 및 사회상 지위 향상’을 꾀하는 것으로, 구체적 사업은 고등 교육 기관에 재학 중인 유학생에 대한 학비 지원, 고학생 지원, 강연회 및 연구회 개최, 기숙사 설립 등이었다. 회원은 통상 회원[조선인, 연회비 3엔], 유지 회원[갑: 월회비 5엔 이상, 을:월회비 1엔 이상 5엔 미만], 찬조 회원[일시금 50엔 이상 기부]의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유학생들은 2명 이상의 회원 소개와 이사회의 승낙을 받고 통상 회원으로 입회할 수 있었지만, 입회 후에도 ‘본회의 목적에 위배 또는 체면을 더럽히는 행위를 했다고 인정되는 자’는 상의원회의 결의로써 제명이 가능했다.
창립 당시 임원 구성은 고문에 사카타니, 야시로, 가노, 사업감독에 마스다와 나가이, 회계감독에 시미즈와 도쿠나가, 위원에 민석현, 박사직이었다. 구체적인 활동은 고학생들의 기숙사비와 식비 일부 보조와 일자리 소개로 시작되었다. 1926년부터는 장래 유망한 고학생의 식비와 학비 전액을 지원하는 급비(給費) 제도가 만들어져 이후 전체 지출의 반 내지 2/3 정도가 학비 지원으로 지출될 정도가 되면서 기숙사보다 급비 제도가 핵심 사업으로 자리잡았다. 1927년 3월 더 튼튼한 재정 기반 마련을 위해 각계의 독지가들의 기부를 받아 재단 법인화했다.
재단 법인이 되면서 임원 구성이 고문/감독/위원에서 상의원/평의원/감사/이사로 바뀌었다. 자강회의 운영 시스템은 조선인들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유학생 입회와 급비생 선발 및 예산 편성을 중심으로 한 실무를 담당하고, 일본인들로 구성된 평의원회/상의원회에서는 이외 안건에 관한 논의, 의결, 이사회의 보고 및 급비생 선발 결정에 대한 사후 승인을 하는 것이었다. 초대 임원으로는 이사장 민석현, 이사 박사직과 조종오(趙鍾浯), 상의원회장 사카타니[상의원 6명], 평의원회장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평의원 32명], 감사 나가이 도루[永井亨]와 시미즈가 각각 임명되었다.
자강회의 설립과 운영을 지원했던 일본인들의 특징을 역대 일본인 임원 및 기부자 67명의 직종으로 살펴보면, 시부사와 에이치[渋沢栄一]와 사카타니와 같이 정재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를 비롯한 거대 재벌, 지진 후 호황을 누리고 있었던 시미즈구미 등의 건설업계가 망라되고, 시미즈구미[清水組] 사장인 시미즈 가즈오가 회계 감사를 맡은 자강회는 탄탄한 재정 기반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유학생 지원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의 이해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강회 급비생 중에는 시미즈구미 경성지점, 시미즈구미 만주지점 및 미쓰비시상사 다롄지점에 취직한 경우도 있었다.
한편 조선인 구성원[이사장, 이사, 유학생 회원]은 천도교계 인물들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유일한 이사장 민석현을 비롯하여 박사직, 조종오, 최광룡(崔光龍), 이영옥(李栄玉), 조기간(趙基栞), 김도현(金道賢), 최병서(崔秉瑞), 강정택(姜鋌澤)의 역대 조선인 이사 중, 박사직, 조종오, 최광룡, 조기간, 최병서, 김도현은 모두 당시 천도교의 중심인물이었다. 유학생 회원들도 마찬가지다. 천도교 청년당 도쿄부[1926년 10월 3일] 및 산하 조직 학생회의 중심인물들 대부분이 자강회 이사 및 회원이었다. 이사장 민석현 스스로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도 천도교계 고학생들의 취직 알선 및 ‘일반 보호’는 자강회에서 맡고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 자강회와 천도교는 불가분의 관계였음은 분명하다. 천도교 도쿄 종리원 간부가 천도교계 고학생을 지원하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일본인 유지의 협력을 얻어 만든 조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생과 졸업생을 포함한 조선인 회원과 일본인 회원의 규모[1924~1941년]를 각각 보면, 조선인 회원은 1929년을 정점으로 점점 줄어든 반면, 일본인 회원은 완만하지만 조금씩 늘어 1930년대에는 조선인 회원을 포함하여 유지 회원 30명 전후, 찬조 회원 55명 전후의 규모로 안정적인 경향을 보인다. 1932년에 조선인 회원 66명, 일본인 회원 78명으로, ‘지원’을 받는 쪽보다 ‘지원’을 하는 쪽이 처음으로 많아졌다. 그후 1934년에는 일본인 회원이 조선인 회원의 1.7배, 1937년에 1.9배, 1939년부터는 2배를 웃돌게 되었다. 회원 수의 비율만 보더라도 자강회의 재정과 운영 기반이 견고했음은 쉬이 추측할 수 있다. 실제 유학생에게 지원된 것은 학비 지원, 고학생들의 일자리 알선과 기숙사 제공, 졸업 후 취직 알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