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행사

원어 항목명 力行社
한자 力行社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4년 9월
해체 시기/일시 1943년 이후
원어 항목명 力行社
성격 일본 유학생 지원 단체
정의

1924년 9월 일본에서 강창기가 일본인 유지와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설립한 유학생 지원 단체.

개설

역행사는 1924년 9월 도요대학[東洋大學]을 중도 퇴학한 강창기(姜昌基)가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오시카와 마사요시[押川方義],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 오타케 칸이치[大竹貫一],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등의 후원을 받아 만든 유학생 지원 단체이다.

설립 목적

품행 방정 고학 역행(力行)하는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기숙사 제공과 학비 보조, 사상 선도, 일자리 알선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사업은 설립 초기에는 기관지 『역행의 조선[力行の朝鮮]』을 발행하면서 고학생 수 명을 돕는 데에 그쳤으나 점차 확대되어 이듬해 1925년에는 사무소에 기숙사를 병설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구체적 사업은 무료 기숙사 운영, 학비 지원, 직업 소개, 식당 운영, 사상 선도, 월간 『역행지광(力行之光)』 발행[실제로는 1933년 말 창간], 아동 보호, 근로자 교화 사업 및 임시 구호였다. 그중 가장 먼저 시작한 주요 사업은 고학생 기숙사였다. 1925년 5월부터 기숙사와 노동자 숙박소, 노동 야학원을 차례로 설립, 운영했지만 1926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때 역행사 사람들이 인근 피재민을 도운 것이 도쿄시, 부의 인정을 받아 보조금을 받았고 일본인 유지의 후원회가 조직되면서 이후 본격적 사업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1927년에는 조선총독부, 1928년에는 은사 재단 경복회(慶福會), 1929년에는 부흥국(復興局)으로부터 자금 및 자재를 보조받으면서 관헌과의 관계가 밀접해질수록 재원은 풍부해졌다. 그 결과, 1929년 6월 548.76㎡[166평] 부지의 철근 콘크리트 2층에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강당, 식당, 도서실까지 갖춘 건물로 신축 이전하였다. 1934년 11월에 성덕학원(聖德學園)을 개설하여 노동 야학, 소년단, 부녀회 등을 두고 인사, 장의, 취직에 관한 상담을 하기까지 역행사의 주요 사업은 유학생 지원, 특히 기숙사 운영이었다.

우선 실업과 혹은 사범과 전공으로 1년 이상 재학 중인 유학생만이 입사 신청이 가능했고, 본적지, 현주소, 재적 학교, 학비 조달 방법, 입사 지원서 등의 서류를 제출한 후 가족 또는 후견인의 보증서, 졸업한 학교와 재학 중인 학교장의 추천서를 구비하여 면접을 거쳐야 했고, 입사가 결정되고 나서도 도쿄에 거주하는 상당한 신분을 지닌 인물의 보증서를 제출해야만 최종 입사가 가능하였다. 굉장히 까다로운 입사 절차인데, 기숙사에서도 기상 및 취침, 소등 시간, 신발이나 의복 등 개인 소지품의 정리 정돈까지 모든 일상생활이 철저히 관리, 통제되었다. 심지어 졸업 및 퇴사 후에도 역행사의 발전을 도울 의무가 부과되었다. 입사생 규모는 첫해인 1924년 23명에서 가장 많았던 1932년 54명 정도였다. 한편 학비 지원은 한 해 평균 10여 명에게 전액 혹은 일부를 지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자리 알선은 고학생의 아르바이트와 졸업생의 취직 소개로 나뉘는데 전자는 신문 배달이나 행상, 자유 노동, 후자는 조선 총독부 및 도쿄시 등의 하급 관리 및 일반 회사의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

이러한 역행사 운영의 실권은 일본인 임원에게 있었다. 일본인 임원은 설립 당시의 후원자, 화재 때의 후원회 멤버, 그리고 1927년 이후 고문, 세화역(世話役), 상담역, 1928년 이후 이사장, 전무 이사, 이사로 나뉘어진다. 이들 40명의 직종별 특징을 보면,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 내무장관 우사미 카쓰오[宇佐美勝夫], 학무국장 세키야 테자부로[関屋貞三郎],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와 같은 조선 총독부 관계자가 가장 많았다. 이러한 특징은 임원뿐 아니라 회비를 내며 역행사 운영을 뒷받침한 회원에게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역행사의 회원은 정회원[연회비 36엔], 특별 회원[일시금 50엔 이상], 찬조 회원[이사회의 추천을 받은 자 또는 일시금 100엔 이상]으로 나뉘는데 자료상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1934년의 규모를 보면 특별 회원 181명, 찬조 회원 51명, 정회원 86명 또는 단체의 순이다. 이 중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미나미 지로[南次郞]와 정무 총감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 유아사 쿠라헤이[湯浅倉平], 이마이다 키요노리[今井田清徳]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찬조 단체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및 미쓰이, 미쓰비시와 같이 조선과 이해 관계가 있는 기업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인 임원 및 회원은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하였다. 우선 임원으로는 실무를 담당한 주간 강창기와 간사 김홍수(金洪秀), 이동수(李東洙), 오계린(呉桂麟), 민달용(閔達鏞), 박만길(朴萬吉), 주사 박승완(朴勝完)의 이름이 확인된다. 그리고 설립 초기 남작이자 중추원참의 박기양(朴箕陽)이 고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박영철(朴榮喆)이 세화역, 전라남도지사 석진형(石鎭衡)이 상담역을 맡았다. 또한 특별 회원과 찬조 회원 중에는, 중추원 참의 한상용(韓相龍), 동일은행장 민대식(閔大植),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이진호(李軫鎬)를 비롯하여 조선의 경제계를 대표하거나 도평의회원 및 경성부협의회원, 중추원 참의를 역임 혹은 재직 중인 인물들이 많았다. 이렇게 조선 식민 통치에 깊이 관여한 정재계 인사가 지원하고 막대한 재원을 확보한 역행사에 대해 유학생 지원이라는 미명 아래 돈벌이를 한다는 의혹도 있었고 실제로 지원을 받은 유학생 수가 역행사 규모에 비해 턱없이 적기도 하다. 정확히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42년까지는 존재하였다.

의의와 평가

유학생 특히 고학생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것은 의의가 있으나, 조선총독부 등 관헌과의 밀접한 관계와 운영 관여는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참고문헌
  • 『力行社昭和六年度会計報告書附昭和七年度予算書』
  • 朴尚僖, 「東京朝鮮人諸団体歴訪記」46(『朝鮮思想通信』, 1928. 1. 6)
  • 「力行社事業概要(昭和四年度)」(『力行之光』7, 1934. 6)
  • 「力行社事業概要(昭和四年度)」(『力行之光』17, 193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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