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과학연구회

원어 항목명 新興科学硏究会
한자 新興科學硏究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도쿄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6년 11월
해체 시기/일시 1931년 10월
원어 항목명 新興科学硏究会
성격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 단체
정의

1926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조직된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계열 단체.

개설

1926년 11월 1일 도쿄에서 일월회(一月會) 회원 이종모(李鐘模), 유영준(劉英俊)과 조선무산청년동맹회의 박천(朴泉), 김삼봉(金三奉) 및 『대중신문』 발행 책임자 최익한(崔益翰) 등 일본 유학생 53명이 유학생 운동의 타개책으로 조직한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계열 단체이다.

설립 목적

현대 사회의 과학적 연구, 조선 민족의 신 발전의 항로 개척, 영원한 인류 평등과 평화 및 행복 증진을 위해 설립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6년 11월 1일 도쿄 와세다[早稲田]에서 열린 창립총회에는 20여 명의 내빈 및 90여 명이 참석했고 최익한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과학적으로 현대 사회를 연구하고 조선 민족의 신 발전의 항로를 개척하고, 장래 영원히 인류 평등과 평화 및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을 창립 목적으로 밝혔다. 전일본학생사회과학연합회의 대표 야마바야시 노보루[山林伸]의 축사에 이어 전일본학생사회과학연합회와의 제휴 및 자유옹호동맹 지지 등을 결의하였다. 임원 선거 결과, 조직부에 최익한, 박천, 송창렴(宋昌濂), 교육부에 김일선(金日善), 강철(姜徹), 안병주(安炳珠), 도서 출판부에 현철(玄喆), 황병석(黃炳碩), 양재도(梁在道), 경제부에 박원희(朴元熙), 박원윤(朴源允), 비서에 조학제(趙鶴濟), 홍양명(洪陽明) 등이 각각 선출되었다. 기타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람은 안병수(安炳洙), 박원근(朴元根), 이병호(李丙鎬), 이우적(李友狄), 김형식(金炯植), 권대형(權大衡), 김동훈(金東訓), 서상석(徐相錫), 김상혁(金相赫), 신현길(申鉉吉)¸ 최돈(崔敦), 박태원(朴台源), 장지형(張志衡), 홍기문(洪起文), 임무(林茂), 박형채(朴炯埰), 강소천(姜小泉), 박인규(朴寅奎), 송형순(宋亨淳), 천용근(千鎔根) 등이었다.

1927년 3월 기관지 『신흥과학』[발행인 이병호]을 창간하여 연 3회, 약 1천 부씩 발행하였다. 현재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28년 7월에 발행된 제2권 제1호[발행인 김동훈]뿐이다. 게재된 글은 권두언 ‘「東京留學生」이란 이데오로기에 對하야-歸國하는 同무들에게’[P生], ‘朝鮮學生運動의 史的考察’[김명(金鳴)], ‘社會科學과 學生層’[一波] , ‘朝鮮無産階級運動과 學生運動의 社會的 意義’[TM生], ‘學生運動의 政治鬪爭에로의 轉向’[남궁허(南宮虛)] , ‘學生鬪爭에 關한 組織을 論함’[김세경(金世耕)], ‘絶對的眞理와 客觀的眞理’[문철(文徹)/TK生], ‘辨證法的唯物論’[김태욱(金太旭)/MT], ‘宗敎表象에 對한 맑스主義的批判’[고준(高峻)], ‘우리의 當面任務에 對하여’[황하일(黃河一)], ‘現敎育에 對한 不平’[해성(海星)], ‘學生과 現實問題’[정치언(鄭致彦)], ‘우리 知識階級의 猛省을 促하노라’[CK生/GKR], ‘編輯餘言’ 등이었다. 이와 같은 목차와 같은 시기 발행되었던 다른 기관지에 『신흥과학』은 ”眞正한 批判의 武器를 戰取”할 수 있는 “學生運動의 戰鬪雜誌”라는 문구의 광고가 게재된 것으로 보아 당대 도쿄의 조선인학생운동의 사상 이론을 선도했음을 알 수 있다.

신흥과학연구회는 동경조선청년동맹, 학우회,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더불어 당시 동경에서의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927년 2월, 친일 관변 단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조선인 단체가 망라되어 동경에서의 조선인 통일전선운동단체,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에 서무부로 참여하면서 동경의 조선인 운동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1927년 5월 신간회 동경지회가 창립되면서 보다 폭넓은 연대 운동이 전개되어, 3·1운동 기념 집회 및 국치일 기념 투쟁과 같은 주된 민족 운동은 연대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1927년의 구체적 활동으로는 2월, 동경의 조우(城右)고등 여학교가 조선인 학생 김정실(金貞實)을 고학생이라는 핑계로 불법적 제명을 한 것에 대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학우회, 학흥회, 재동경조선청년동맹, 협동조합,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재동경여자청년동맹, 재동경조선교육연구회, 불령사(不逞社), 무산학우회, 재동경조선불교청년회, 재일본교토조선유학생학우회와 함께, 이 제명 조치는 “계급적 박해와 민족적 차별의 이중의 악의가 있는 인권 유린”이라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 배포하는 항의 활동을 벌였다. 1927년 9월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신간회 동경지회가 조선 공산당사건 관련 공판 비공개에 항의하여 만든 조선 총독 폭압 정치 반대 동경지방동맹에, 재동경조선청년동맹, 재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 동경조선노동조합, 학우회, 협동조합운동사, 여자학흥회, 동경노동조합 각 지부와 함께 참여하였다. 1927년 9월 17일에 열린 창립총회는 김한경(金漢卿)의 사회로 선언 규약 및 표어, 운동 방침과 조선 공산당 사건 관련 공판 비공개에 대한 항의문을 다나카[田中] 내각과 조선 총독 및 경성 지방 법원장에게 발송할 것을 정하고 전형 위원 5명과 상무위원-서무: 송창렴, 김상혁, 김성숙(金成璹), 선전: 박균(朴均), 김계림(金桂林), 김순실(金舜實), 조사: 강철, 이철(李徹), 주병노(秦炳魯)를 선출하였다.

또한 1927년 11월 1일 ‘조선 공산당 사건’ 피고에 대한 경찰의 고문취조에 대한 항의문을 신간회 도쿄지회, 재일조선노동총동맹, 도쿄조선청년총동맹 등과 함께 공동으로 작성해 일본 수상, 경성지방법원 판사, 검사 등에게 발송하였다.

한편 1927년 11월 13일, 신흥과학연구회 회관에서 제2회 정기 총회를 개최하여, 일반 정세와 활동 보고를 한 후, 결의안으로서 운동 방침 확립 건, 선언 강령 발표 건, 신간회 지지 건, 조선 총독 폭압 정치 반대 동맹지지 건, 조선학생연맹촉진 건, 일본과 타이완 중학생사회과학연구회와 제휴 건, 기관지 『신흥과학』 확립 건, 강사단 활동 방침 건, 연구 코스 개정 건, 규약 수정 건 등을 논의, 결정하였다. 그러나 활동이 본격화될수록 당국의 탄압 또한 강화되어, 1927년 11월 7일 열린 러시아 혁명 10주년 기념 성명서를 문제삼은 경찰은 신흥과학연구회 상무 위원 이병호와 동 발기인이자 신간회 동경지회 간사 박형채를 포함한 23명의 조선인이 검거되었다.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의 이름으로 모인 각 단체는 취조 중 자행된 폭행과 고문에 항의하고 책임자 처벌, 조선인 즉각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1927년 12월 24일에는 조선총독부 폭압정치반대동맹,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신간회,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과 함께, 중국 동북부에서의 조선인 박해 문제를 중국인과 조선인의 민족 간 갈등으로 치부하고 본질을 은폐하려 하는 일본 정부 및 조선 총독부에 항의하고 진상을 알리는 보고회를 개최하였다.

1928년 1월 27일 신간회 동경지회관에서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동맹 제창으로 신흥과학연구회는 재동경조선청년동맹, 재일본조선노총, 동경조선노동조합, 학우회, 신간회 동경지회, 근우회 도쿄지회,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과 함께 조선노농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 탄압에 대한 반대 운동을 위해 삼총해금(三總解禁) 관동동맹을 조직하였다. 각 부서 및 인물은 서무부-조영(趙永), 김상수(金相壽), 김순실, 선전부-조사원(曹士元), 장준석(張準錫), 권대형, 연락부-김계림, 주병노, 박형채 등이었다. 1928년 5월에는 경성 여자 상업 학교 및 함흥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의 운동을 지지하고 그 운동에 대한 당국의 탄압을 지탄하기 위해 격문을 발송하는 등 학우회, 학흥회와 같은 유학생 단체와 재일본조선청년동맹과 함께 전개하였다.

이러한 신흥과학연구회의 활동에 당시 유학생들도 크게 호응하여 1928년 5월 16일 일본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신입생 환영 대강연회에 천여 명이 넘는 유학생들이 참가했고 회장이 좁아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도 수백 명이 넘었다. 1928년 6월, 조선 공산당 일본부는 신흥과학연구회 내에 고려 공산청년회 일본부 프랙션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병호, 김강(金剛), 서인식(徐仁植)이 책임을 맡았다.

1929년 2월에는 원산노동쟁의를 지원하기 위해 회원들이 6원 4전의 모금을 모아 원산노동연합회에 송부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조선인 운동, 특히 공산주의 계열 운동에 대한 당국의 탄압으로 핵심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고, 1931년 10월 고려 공산청년회 일본부가 해체를 결의함으로써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기관지 『신흥과학』 발행,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운동, 3·1운동 기념 집회, 국치일 기념 투쟁, 삼총해금반대운동, 조선의 학생 및 노동 운동 지지 등을 통해 한 시기 재일 조선인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대 중후반 공산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청년 단체이다.

참고문헌
  • 朴慶植, 『在日朝鮮人運動史: 8.15解放前』(三一書房, 1979)
  • 『朝鮮出版警察月報』7
  • 「輸移入 新聞 雜誌 普通出版物 및 그 取締狀況: 新聞 雜誌의 輸移入狀況」(『新聞紙出版物要項』, 1927)
  • 「재일조선학생단체 격문」(독립기념관 자료번호: 5-001304-000)
  • 『동아일보』(1926. 11. 6, 1927. 9. 24, 1927. 11. 18, 1927. 11. 24)
  • 『중외일보』(1927. 3. 6, 1927. 3. 26, 1927. 11. 8, 1928. 5. 3, 1928. 5. 26, 1930. 9.10-1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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