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東京朝鮮苦学生同友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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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0년 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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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23년 5월 이후 |
원어 항목명 | 東京朝鮮苦学生同友会 |
성격 | 사회단체 |
1920년 1월 일본 도쿄도에서 설립된 재일 고학생 지원과 조선인 노동자의 일치단결을 위한 단체.
1917년 1월 “재경 조선인 노동자 상호 친목을 도모하고 지식 계발,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홍승로(洪承魯)의 발기로 조직된 동경 노동동지회에서 시작되었다. 1920년 1월 25일 창립 대회를 열고, 조선고학생동우회로 개칭하였다. 1921년 말 ‘순’고학생 조직인 형설회(螢雪會)와 사상 단체인 흑도회가 분리된 후 1922년 메이데이 행사에 참가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활동이 확인되지 않는다.
창립 초기 임원 구성은 회장 박일병(朴一秉), 총무 홍승노, 부장 박형병(朴衡秉), 한윤동(韓潤東), 이상수(李相壽), 유영준(劉英俊), 현덕신(玄德信), 유득신(劉得信), 김종필(金鍾弼)이었다. 이외에도 박열(朴烈), 김약수(金若水), 백무(白武), 최갑춘(崔甲春), 황석우(黃錫禹), 임택룡(林澤龍) 등이 간부로 활동했고 회원은 약 200여 명이었다.
1921년 7월과 8월에는 도쿄 유학생들의 극예술협회[1920년 창립, 주요 멤버는 김수산(金水山), 조명희(趙明熙), 홍해성(洪海星), 진장섭(秦長燮), 고한승(高漢承), 김영팔(金永八), 홍난파(洪蘭坡), 마해송(馬海松), 윤심덕(尹心悳) 등 50여 명]가 찬조한 동우회 순회연극단을 꾸려 조선 각지에서 공연을 했다. “고향 형제에게 신문화의 진미를 선전”하고 회관[기숙사]을 건립하기 위해 기획된 순회연극단은 『동아일보』와 조선노동공제회, 각지의 청년회 등의 후원을 받고 조명희의 창작극 「김영일(金英一)의 사(死)」와 홍난파의 창작극 「최후의 악수」 등을 상연했는데 연일 큰 환영을 받았다.
이후 사상 단체로의 전환을 꾀하는 그룹과 ‘순’ 고학생의 친목 부조 단체를 지향하는 그룹이 나뉘며 대립하기 시작했다. 결국 1921년말 이영실(李英實), 류진걸(柳震杰) 등은 20여 명의 회원과 함께 ‘순’ 고학생 단체 형설회를 별도 조직했다. 한편 동우회 간부 중 박열, 김약수, 임택룡, 홍승로, 황석하(黃錫河), 정태성(鄭泰成), 김사국(金思國), 정태신(鄭泰信), 이용기(李龍基), 이익상(李益相), 박석윤(朴錫胤), 원종린(元鍾麟) 등 12명은 1922년 2월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일보』 2월 4일자에 ‘전국 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문[일명 동우회 선언]을 연명으로 발표했다. 내용은 “우리 조선고학생동우회는 일본의 주요 사상 단체 및 노동 단체와 제휴하며 노동 대학의 설립, 잡지 『동우』의 발행 등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할 것이며 이제는 고학생 및 노동자의 구제 기관임을 버리고 계급 투쟁의 직접적 행동 기관임을 선언”한다는 것이었다. 즉 계급 운동으로의 활동 방침을 선언하였다. 동우회 선언을 주도한 이들은 1921년 11월 29일 만들어진 사회주의 운동 단체 흑도회(黑濤會)의 중심 멤버였고 이후 주된 활동은 흑도회로 이루어졌다. 도쿄 조선고학생동우회 이름으로 이루어진 활동으로 확인되는 것은 1922년 도쿄 조선고학생동우회원 30여 명이 메이데이 행사에 참여해 송봉우와 백무 등이 ‘조선 노동자의 계발, ‘자본벌 타파’ 등의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는 정도이다.
고학생 지원, 노동자의 일치단결을 목적으로 했다.
1920년 1월 25일 창립하였다. 이후 사상 단체로의 전환을 꾀하는 그룹과 ‘순’ 고학생의 친목 부조 단체를 지향하는 그룹으로 나뉘며 대립하기 시작했다. 결국 1921년 말 이영실(李英實), 류진걸(柳震杰) 등은 고학생 단체 형설회를 별도 조직했다.
한편 동우회 간부 중 동우회 선언을 주도한 이들은 1921년 11월 29일 만들어진 사회주의 운동 단체 흑도회(黑濤會)의 중심 멤버가 되었다. 1923년 본격적인 사회주의 노동 단체로 전환하기 위해 도쿄 조선노동동맹회로 발전적 해소를 했다.
고학생 지원, 노동자를 위한 강습회 및 순회강연회 개최, 일자리 소개, 잡지 발행, 순회 연극단 등을 도쿄 조선고학생동우회의 사업으로 들 수 있다. 1920년 1월 25일 창립 당일 300여 명이 모였고 향후 고학생을 적어도 매년 50명씩 양성하고 일본 전국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일치단결하여 항상 단합에 힘쓰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구체적인 사업은 1) 고학생의 입학 준비 지원, 노동자의 인격 향상을 위한 강습회 개최, 2) 노동자의 단결과 자각을 위해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순회강연회를 열어 세계 대세를 알리고 노동자의 지위를 깨닫게 함, 3) 의사를 초빙하여 고학생과 노동자가 아플 때 무료로 치료, 4) 기숙사 설립, 5) 직업 소개, 6) 잡지 발행 및 매달 강연회 및 토론회 개최 등이었다. 이에 필요한 자금은 독지가들의 기부로 마련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창립 당시 500엔의 기부금이 모였다고 한다. 이 소식에 『동아일보』는 1920년 7월 15일자 1면 가장 위 1, 2줄을 이용하여 「동우회에 대(對)하야 인류 향상(人類向上)의 무거운 책임」이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활동을 독려했다.
1920년 5월에는 유득신을 교장으로 근성(槿城)학교라는 야학을 설립해 매일 밤 노동자들의 학술, 사상 계발을 위한 교육 활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