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흥학회

원어 항목명 大韓興学会
한자 大韓興學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도쿄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9년 1월
해체 시기/일시 1910년
원어 항목명 大韓興学会
성격 유학생 단체
정의

1909년 일본 도쿄도에서 결성된 유학생 통합 단체.

개설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는 태극학회[1905년], 대한학회[1908년]를 중심으로 공수학회[1906년]와 연학회를 통합한 단체로서 1909년 1월 10일에 결성되었다. 첫 유학생 통합 단체의 탄생이었다.

설립 목적

대한흥학회는 기존의 유학생 단체의 활동 계승, ‘돈의연학(敦誼研学) 및 국민의 지덕 계발’, 유학생들의 효율적인 단결 및 학술 진흥,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이 목적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초대 회장 채기두(蔡基斗), 부회장 최린(崔鱗)과 김지간(金志侃), 총무 김홍양(金鴻亮), 최창조(崔昌朝), 평의원 허헌(許憲), 김지간, 문상우(文尚宇), 진경석(陳慶錫), 박병철(朴炳哲), 이풍재(李豊載), 김현식(金鉉軾), 유승흠(柳承欽), 유태노(劉泰魯), 한용(韓溶), 정세윤(鄭世胤), 이은우(李恩雨), 박용희(朴容喜), 이창환(李昌煥), 한상우(韓相愚), 김기환(金淇驩), 윤정하(尹定夏), 장용은(張鏞殷), 김진용(金晋庸), 이득년(李得年), 박해원(朴海遠), 이인창(李寅彰), 최명환(崔鳴煥), 강인우(姜麟祐), 구자학(具滋鶴) 등이 임원이었다. 창립 회의에서 선출된 임원 총수 79명였는데, 당시 도쿄 유학생은 500~600명 정도였다. 대한흥학회는 태극학회 지회를 이어받아 함경도 영흥, 평안도 영유와 용의[용천과 의주], 성천 네 곳의 지회와 훗날 의주의 면학근목회를 태극흥학회의 지회로 승인했다. 그리고 1909년에는 서울의 광화신숙(廣化新塾), 1910년 3월에는 진주 지회를 각각 승인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기관지 『대한흥학보』 발행을 들 수 있다. 월간 『대한흥학보』는 1909년 3월부터 ‘국민의 지적 계발을 꾀하고 국민의 실력 향상 및 정신적 자각’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발행되었다. 한 번에 2,000권을 발행하여 그중 500권은 유료 독자에게 판매하고 나머지 1,500권은 회원 및 조선의 각 단체, 학교, 신문사, 미국 등지의 해외 동포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사회의 혁신, 산업장려, 국민의 정신적 강성, 독립 부강의 기초 확립, 대한제국 청년으로서의 임무와 목표, 근대 자유 민주주의 사상 등에 관한 논설을 게재하고 국민의 계몽에 힘을 쏟았다. 『대한흥학보』는 조선과 미국의 독자들에게 크게 환영받아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을 때나 정간의 위기가 닥쳤을 때 모금이 답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여름 방학을 이용해 조선에 운동단을 파견하여 각 도시를 돌면서 친선 시합을 하거나 계몽 활동의 일환으로 토론회, 연설회 및 강습회를 열었다. 1909년 4월에는 메이지[明治] 대학, 호세(法政) 대학, 니혼[日本] 대학, 와세다[早稻田] 대학, 주오[中央] 대학의 다섯 대학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연설단이 파견되어 5대학 연합 연설회가 열리기도 했다. 1909년 6월에는 회원 이완종 등 8명이 귀국하여 7월부터 40여 일 동안 총 600명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열었다.

1909년 9월부터 일진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일 병합 운동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12월 4일에 발표된 일진회의 상소에 대항하여 대한흥학회는 4월 20일 임시 총회를 열고 국민들에게 고하는 ‘포고 13도문’[고원훈(高元勳) 작성], 대한제국 내각에 호소하는 ‘내각서’[이승근(李承謹) 작성], ‘토(討)일진회론’[조용은(趙鏞殷) 작성]의 세 문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를 각 500부씩 인쇄하여 조선으로 가져가기 위해 고원훈과 이풍재를 서울로 파견했지만 문서는 경찰에 압수당하고 연설회 개최도 허가받지 못했다. 그리고 1910년 3월, 대한흥학회는 평의원회를 열고 ‘한국 병합’ 반대 결의를 통과시키고 격문을 작성, 배포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이러한 유학생들의 동향을 경계하던 일본이 대한흥학회 중심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행을 붙여 유학생 감독부와 기숙사, 대한흥학회 본부가 있었던 주일한국공사관에 여러 명의 형사를 파견했다. 결국 1910년 5월, 『대한흥학보』 제13호가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압수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정간되고 말았다. 그리고 1910년 8월 24일, 한국 병합에 항의하여 조선으로 돌아가는 유학생도 적지 않아 600여 명에 달했던 유학생들이 270명으로 감소한 상황에서 대한흥학회는 해산당했다. 해산 당시 회장은 문상우, 부회장 이인창(李寅彰), 총무원 이풍재(李豊載)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 유학생들의 온전한 첫 통합 단체이자 앞으로 일제 강점기 유학생 단체와 운동의 토대를 구축했다.

참고문헌
  • 김기주, 『한말 재일 한국 유학생의 민족 운동』(느티나무, 1993)
  • 최경숙, 「대한흥학회에 대해」(『부산외국어대학교논문집』3, 부산외국어대학교, 1985)
  • 정태주, 「대한흥학회의 성립과 활동」(단국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96)
  • 표영수, 「대한제국 말기 재일본 유학생의 애국 계몽 사상」(『숭실사학』11, 숭실대학교사학회, 1998)
  • 『大韓興學報』1(1909)
  • 「日本留学生ノ夏期講習会開催」(『統監府文書』憲機1241, 1909. 6. 14)
  • 「朝鮮人概況」1916(『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1, 三一書房, 1975)
  • 朴己煥, 「近代日韓文化交流史研究」(大阪大学博士学位論文, 1998)
  • 『新韓国報』(1910. 7. 19)
  • 『皇城新聞』(1909. 11. 11, 1910. 6. 7)
  • 『朝日新聞』(1909. 12. 20, 1910. 8. 25)
  • 『読売新聞』(1910. 6. 1, 1910.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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