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선융화공조회

원어 항목명 內鮮融和共助会
한자 內鮮融和共助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31년 7월
최초 설립지 일본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야에정
원어 항목명 內鮮融和共助会
성격 내선융화단체
설립자 김인엽
정의

1931년 7월 일본 히로시마현에서 내선 융화를 목적으로 조직된 재일 조선인 친일 단체.

개설

내선융화공조회는 1931년 7월 조직된 이후 히로시마 지역을 중심으로 내선 융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1930년대 말에는 활동 범위를 규슈 지역까지 확장하였다.

설립 목적

내선융화공조회는 히로시마 지역에 거주하는 재일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내선 융화와 사상 선도 활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변천

내선융화공조회는 1931년 7월 19일 히로시마현[広島県] 야마가타군[山県郡] 야에정[八重町]에서 김인엽(金仁燁)[金納仁一郞]을 회장으로 조직되었다. 1932년 85명의 회원이 있었다. 1936년 회원수는 재일 조선인 20명, 일본인 30명 정도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활동 범위는 히로시마현 및 인근 지역으로 넓은 편이었다. 김인엽은 내선융화공조회가 해체될 때까지 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내선융화공조회는 김인엽 등 재일 조선인 150명이 1931년 6월 야에경찰서장에서 내선 융화와 조선인 교육의 보급 공로로 감사장과 은컵을 증정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34년 9월 야에정의 다이후쿠지[大福寺]에서 융화와 시국 모임을 개최한 이후 김인엽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36년 4월 히로시마현 다카다군에서 영화회를 개최한 후 김인엽이 내선 융화와 공존 공영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후 히로시마현 외에도 야마구치[山口]현과 시마네[島根]현 등 인접 지역으로까지 강연 활동을 확대하였다. 내선융화공조회는 징병제 실시를 위한 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37년 8월 내선융화공조회 총회에서 조선인을 병역에 채용할 것을 건의하였고, 9월 황군 장병의 승리를 기원하는 전문을 보냈다. 1938년 3월 지원병 제도의 실시를 기념하는 축하회를 개최하고, 육군 부상병에 대한 위문 활동도 전개하였다. 1938년 8월 29일 일제의 조선 강점을 기념한 신사 참배와 기원제를 지낸 후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시국강연회에서는 국방 헌금을 즉석에서 모금하여 이른바 부상 장병을 위문하고 기부하였다. 1939년 일제의 조선 강점을 기념한 강연회를 학교, 공장, 회사 등지에서 전개하였다. 이때 강연회 참석자들의 소감문을 모아 단행본으로 간행하여 조선에 배포하였다. 1939년 7월과 8월 배영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흥아의 대적 영국」이라는 규탄문을 작성하여 일본 수상과 영국 대사에게 우송하였다. 내선융화공조회의 회장인 김인엽은 1941년 6월 후쿠오카[福岡] 협화회 노가타[直方] 지회에서 7일간 강연하였다.

의의와 평가

내선융화공조회는 다른 지역의 내선 융화 단체와는 달리 활동 기간도 길었을 뿐만 아니라 활동 범위도 인근 지역으로까지 확장한 단체였다. 재일 조선인의 친일 활동을 파악하는 데 의미 있는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동명 외, 『일제 강점기 재일 조선인 단체 편람』(민족문제연구소, 2010)
  • 『特高月報』(日本 内務省 警保局 保安課, 1938. 3, 1939. 2)
  • 『大阪每日新聞』(1931. 6. 23, 1938. 3. 15, 1939.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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