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內鮮同愛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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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內鮮同愛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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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8년 |
원어 항목명 | 內鮮同愛会 |
성격 | 내선융화단체 |
설립자 | 이봉주|홍소룡 |
1926년 일본 효고현에서 재일 조선인 내선 융화를 목적으로 조직된 친일 단체.
내선동애회는 1926년 일선 융화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내선동애회는 1926년 3월 31일 효고현 아마가사키[尼崎]시에서 이봉주(李鳳柱), 홍소룡(洪小龍)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회장은 홍소룡이었다. 내선동애사(內鮮同愛社)라고도 한다.1928년 4월 홍소룡이 내선동애회를 탈퇴하고 내선협화회를 조직하였다. 1929년 3월 총회를 개최하여 김봉도를 회장으로 선임한 후 사무소 신축과 부인부 및 새로운 지부의 설치에 대해 협의하였다. 1929년 정치부를 신설하였다. 1930년 10월 17일 임시 총회를 개최하여 박병인이 회장, 안경봉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3월 안경봉이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김봉도가 고문이 되었다. 1934년 2월 김임이 회장, 이봉계, 구재시가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35년 이봉주가 회장이 되었다. 내선동애회는 1938년 협화회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내선동애회는 조직 이후 야학을 설치하여 조선인 노동자에게 일본어를 강습하였다. 1927년 11월 오사카의 오와다[大和田]정에 지부를 설치하고 야학을 개설하였다. 일제의 내선 융화 정책에 부응하는 한편 언어의 불통으로 인한 경제적·정신적 손실을 줄이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26년 아마가사키시의 조선인 토목 노동자 10여 명이 임금을 받지 못하자 내선동애회의 회장 홍소룡은 항의 연설회를 아마가사키시의 노동 운동 지도자인 안도 가에몬[安藤嘉右衛門]과 협력하여 개최하였다. 1929년 5월 유리 공장의 임금 체불 반대 투쟁을 지원하였다. 1928년 조선인 대의사 선거와 관련하여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조선인을 위해 홍소룡 등이 정견을 조선어로 번역하여 조선인에게 제공하고 투표를 독려하였다. 나아가 정치적 활동을 위해 정치부를 설치하였다. 1928년 3월 조선인 야학, 구제사업, 무료 숙박소의 설치 등에 대해 시당국의 반성을 촉구하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1928년 9월 아마가사키시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해 가옥에서 퇴거할 것을 명하자 오와다지부 주도로 조선인 가옥 50호 건설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1년 직업소개소 강화, 소비조합 설치, 야학 확대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와의 타협성 때문에 조선인 운동 세력으로부터 비판받았다. 특히 1930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계열의 조선인 노동자 30여 명과 물리적인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1931년 11월 민중구락부와 함께 재만 조선인 희생자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1933년 12월 아마가사키시의회 의원 사가와 기키타로가 ‘조선인들의 거주로 인해 이 지역 발전이 저해된다.’고 한 발언에 항의하여 1934년 2월 조선인에 대한 차별 철폐와 참정권 부여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시 체제가 강화되면서 1937년 7~8월 중국 전선에 보낼 위문금품의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고, 시국강연회와 영화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 1월 내선국방청년단과 함께 지원병 제도 확립 감사 축하회를 개최하였다.
내선동애회는 다른 지역의 내선 융화 단체와는 달리 활동 기간이 길었고, 아마가사키시의 재일 조선인의 친일 활동을 파악하는 데 의미 있는 단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