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朝鮮女子学興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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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女子學興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0년 1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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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일본 도쿄도 |
원어 항목명 | 朝鮮女子学興会 |
성격 | 재일 조선인 여자 유학생 단체 |
설립자 | 길정희|이덕요|한소제|황신덕 |
1920년 1월 일본 도쿄도에서 조선인 여자 유학생들이 친목과 여성 교육 보급을 위해 조직한 단체.
조선 여자학흥회는 1915년 결성된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東京女子留學生親睦會)[조선여자친목회]를 개칭하여 1920년 1월 4일 조직되었다.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길정희(吉貞姬)·이덕요(李德耀)·한소제(韓小濟)·황신덕(黃信德) 등 4명이 “무슨 일이 있어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며, 절대 비밀을 지키고, 근검절약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은다.”는 혈서(血書)를 써 독립운동을 결의하고 겉으로는 친목 단체를 표방하면서 결성된 단체이다.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와 항상 긴밀한 연락하며 활동하였다. 조선 여자학흥회 결성 당시 회장은 유영준(劉英俊), 부회장 현덕신(玄德信)이었다.
조선 여자학흥회는 설립 취지 및 강령으로 조선 여성의 교육 보급과 지식 향상을 표방하였다.
조선 여자학흥회는 서울에 지부를 두고 활동하였으며,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 기관지였던 『여자계(女子界)』를 다시 발간하였다[재정 문제로 1921년 7월 휴간]. 1920년 3월 히비야[日比谷]에서 최원순(崔元淳)·이현경(李賢卿)·황신덕이 태극기를 반입하고 3·1 운동 1주년 기념식 투쟁을 전개하여 수백 명의 유학생과 함께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도쿄의 조선인 여자 유학생은 약 30명이었는데 7명이 이날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황신덕과 이양전(李良傳)이 주모자로 구류 처분을 당하였다.
1920년 5월 임원진을 개선하고 편집부·변론부(辯論部)·교제부(交際部) 등으로 조직을 개편한 후 부원을 두고 활동하였다. 7월 20일 조선에서 순회 강연을 하면서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 등으로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조선에 강연단을 보내 주로 여성 문제와 사회 현실에 대한 의식 교양, 문화 선전 등을 실시하였다. 1923년 봄 중진회원이었던 유영준·황신덕·한소제 등이 탈퇴하고 9월 발생한 관동 대지진의 여파로 타격을 받아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 여자학흥회는 간부들만이 집회에 참석할 뿐 단체의 활동이 거의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1924년 회장 최진상(崔眞相), 총무 박명련(朴命連, 朴順天), 간사 한연순(韓連順)·최영상(崔英相)·김량(金良) 등으로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당시 회원 수는 30명 정도였다. 하지만 1월 초 『동아일보』에 이광수(李光洙)가 「민족적 경륜(經綸)」이라는 사설을 게재하자, 총독 정치를 시인하는 것이라면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유학생들의 재도쿄 조선인대회를 개최하고 재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도쿄 조선노동동맹회 등 총 11개 단체 이름으로 이광수의 논설을 취소하고 사죄를 요구하는 동아일보 배척 성토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3월 1일 재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등과 함께 3·1 운동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조선 여자학흥회는 1925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9개의 재일 조선인 단체가 재일 조선인을 가상의 적으로 삼는 학생 군사 훈련을 규탄·항의하기 위해 1925년 11월 1일 개최한 가상적(假想敵) 문제 규탄 대연설회에 이도벨이 조선 여자학흥회 대표로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