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朝鮮無産者社会連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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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無産者社會聯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오사카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4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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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일본 오사카부 |
원어 항목명 | 朝鮮無産者社会連盟 |
성격 | 재일 조선인 사회 운동 단체 |
1924년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조직되어 활동한 재일 조선인 사회 운동 단체.
조선 무산자사회연맹은 1924년 6월 28일 오사카에 있던 재일조선인 최선명(崔善鳴), 김태엽(金泰燁)[김돌파], 고순흠(高順欽) 등이 조직하였다. 최선명은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를 졸업하고 오사카의 아나키즘 단체인 남흥여명사(南興黎明社)와 간사이 조선인연맹[關西朝鮮人聯盟]을 조직한 인물이었다. 김태엽은 니혼대학[日本大學]을 나와 도쿄 조선노동동맹회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었다. 제주도 출신의 고순흠은 서울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控除會) 등에서 활동하다가 1924년 3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와 최선명 등과 교류하였다. 조선 무산자사회연맹 회원들은 일본인 활동가 기모토 쇼타네[木本正胤] 등과도 밀접히 연계하면서 활동하였다.
조선 무산자사회연맹은 조선인의 자력으로 현재의 지위에서 탈출하여 신문화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제 당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선 무산자사회연맹의 회원은 5명이고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고 한다. 주도자들의 성향으로 아나키즘 단체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단체가 결성된 1924년 6월 28일 기모토 쇼타네의 후원으로 오사카 덴노지[天王寺] 공회당에서 차별 문제를 주제로 조선인 문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연설회에는 조선인 300명, 일본인 400명이 참석하였으며, 최선명·고순흠·김태엽 3인이 연설하였는데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비판하는 내용도 있었다. 7월 20일 삼일청년회(三一靑年會) 등과 공동 주최로 조선인 문제 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8월 5일 조선 무산자사회연맹 주도로 조선인 언론 압박 탄핵 대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인 언론 압박 탄핵 대회는 조선 총독부가 친일 단체를 육성하고 민족 운동 세력의 집회를 탄압한 데 대한 항의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회 준비 과정에서 최선명은 오사카 조선노동동맹회 집행위원인 송장복(宋章福)과 협의하고, 남흥여명사·오사카 조선유학생학우회·삼일청년회·사카이선인동지회[堺鮮人同志會] 등과 협력하였으며, 재일조선노동총동맹 오사카연합회와 수평사(水平社)의 응원을 받았다. 대회에서는 조선 독립, 총독 정치에 대한 비판이 나와 단체 해산 명령을 받았다. 조선 무산자사회연맹의 해산 여부는 알 수 없으며 1925년 이후 뚜렷한 활동은 확인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