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방위위원회

원어 항목명 祖国防衛委員会
한자 祖國防衛委員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50년 6월 28일
원어 항목명 祖国防衛委員会
정의

1950년 6월 28일 재일 한인 사회의 좌익계가 주도적으로 활동한 일본 공산당 민족대책부에 조직된 군사 활동 기관.

개설

1949년 9월 재일본조선인연합회가 해산된 이후 좌익계 재일 한인들은 1939년 12월 결성된 일본 공산당 민족대책부의 지도하에 활동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민족대책부의 지시 아래 비공식적으로 조국방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50년 6월 28일 일본 공산당 민족대책부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일본 도쿄도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에 조국방위위원회를 두었다. 조국방위위원회 지도하에 지역별로 조국방위대가 만들어졌다. 10월 29일 교토에서 조국방위 재일조선청년전선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조국방위위원회는 비공식적인 조직이었지만 11월 15일 기관지로 『신조선』을 창간하였다. 1951년 2월 개최된 일본 공산당 제4회 전국협의회와 10월 16일 개최된 제5회 전국협의회에서 재일 한인을 소수 민족이 아니라 일본 내 제민족으로 결정함에 따라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0월 21일 재일 한인 당면의 투쟁 방침이라는 지령이 하달되었다. 재일 한인의 당면 투쟁이 재일 한인의 생존권 요구, 미제국주의 추방, 민족 해방에 있다고 하여 조국방위대를 편성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조국방위대의 재일 한인은 일본 공산당 중핵자위대와 연대하여 1951년 말부터 1952년 중반까지 전국에서 화염병 투척 등으로 무기 및 탄약의 제조, 수송을 저지하고 강제 소환을 반대하기 위한 실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실력 투쟁은 1952년 5월 1일 도쿄 메이데이사건, 스이타[吹田] 사건, 오스[大須] 사건 등으로 나타났다.

현황

조국방위위원회가 조국방위대를 중심으로 전개한 민중 봉기와 같은 가두 전술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되어 일본 공산당의 전술 전환으로 시들해졌고, 1955년 노선 전환과 민족대책부의 해소로 조국방위위원회와 행동대인 조국방위대도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국방위위원회와 행동대인 조국방위대는 재일본조선인연합회 해산 직후 만들어진 일본 공산당 민족대책부가 지도하였지만, 재일 한인 좌익계가 주도하였다.

참고문헌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재일 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삼인, 2003)
  • 남기정, 「한국전쟁 시기 재일 조선인 운동 재고: 지방의 움직임을 중심으로」(『일본공간』19,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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