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령사

원어 항목명 不逞社
한자 不逞社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도쿄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3년 4월
최초 설립지 일본 도쿄도
원어 항목명 不逞社
성격 아나키즘 단체
설립자 박열(朴烈)
정의

1923년 일본 도쿄에서 박열 등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아나키즘 단체.

개설

불령사(不逞社)는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인 박열(朴烈)박열의 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등이 1923년 4월경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을 규합하여 조직한 아나키즘 단체이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을 계기로 일제는 불령사를 대역(大逆) 사건을 일으킨 폭동적인 비밀결사로 지목하여 구성원 다수를 검거하였고, 그 후 불령사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설립 목적

테러를 수단으로 조선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으나, 조직 자체는 대중 단체를 지향하였다.

변천

3·1운동 이후인 1919년 가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고학생(苦學生)으로 생활하던 박열은 1920년대에 일본에 있던 조선인 학생과 지식인들의 민족 독립운동이 고양되자, 1921년 11월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나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등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다.

1922년 초 흑도회 내에서 사상적 분화가 뚜렷해져감에 따라 1922년 9월 박열·정태성(鄭泰成) 등 무정부주의자들이 주도하여 풍뢰회(風藾會)를 조직하였다. 풍뢰회는 1923년 1월 흑우회(黑友會)로 개칭하여 일본 사상 단체들과도 연계를 맺으면서 아나키즘 선전에 주력하였다. 주요 구성원은 박열을 비롯해 홍진유(洪鎭裕), 박흥곤(朴興坤), 신염파(申焰波), 서상일(徐相一), 장상중(張祥重) 등이며 가네코 후미코도 참여하였다.

흑우회 활동을 모체로 하여 박열은 이와는 별도로 더 많은 사람을 규합하기 위해 1923년 4월 도요타마군[豊多摩郡] 요요기[代代木]에 있는 자신의 2층 셋방에서 별도로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해 김중한(金重漢)·홍진유·육홍균(陸洪均) 등 조선인 15명과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니야마 하츠요[新山初代]·오가와 다케시[小川武] 등 일본인 6명으로 총 21명이었다.

그런데 직접 행동을 지향한 박열불령사가 결성되기 전인 1922년 말부터 중국에서 폭탄을 유입하고자 시도했으며, 1923년 10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는 사실상 흑우회의 활동이었는데, 그 내부에서 박열과 김중한·홍진유 등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 흑우회 해체까지 주장되었고 계획은 결국 실패하였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일제 당국은 박열 등을 ‘보호’라는 명목으로 검속하였다. 취조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구입 사실이 드러나자, 일본 검찰은 불령사 회원 전원을 기소하면서 불령사가 ‘폭력에 의한 직접 행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단체’라고 규정하였다. 나아가 이를 ‘대역 사건[천황 암살 모의 사건]’으로 비화시키고 이를 ‘불령사 사건’이라 칭하였다. 박열은 일본 검찰에게 자신의 폭탄 유입 계획을 폭로하면서 불령사는 이와 무관함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박열가네코 후미코, 김중한을 제외한 나머지 회원들은 예심 종결과 함께 1924년 6월 모두 방면되었다. 1926년 6월 박열가네코 후미코는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박열 등의 구속으로 불령사는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일본 내 조선인 아나키스트 운동은 매우 위축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부분 고학생이나 노동자로 구성된 불령사는 대중 단체를 지향한 조직이었다. 회원은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가입할 수 있었으며, 탈퇴할 경우 전 회원 앞에서 의사를 밝혀야 했다.

매월 1회의 모임을 가졌으며, 수평 운동(水平運動)과 노동 운동을 지지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하고, 저명한 아나키스트 모치즈키 가츠라[望月桂] 등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의의와 평가

불령사박열·홍진유 등 흑우회 회원을 비롯해 일본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여 대중적인 활동을 전개한 단체이다. 하지만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6,000명 이상을 학살한 일제는 불령사를 ‘폭동을 계획한 비밀결사’로 몰아가려 했다. 학살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일제의 계획은 사건의 진실이 드러남에 따라 실패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형설출판사, 1978)
  •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지식산업사, 2001)
  • 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이학사, 2008)
  • 김동명 외, 『일제 강점기 재일 조선인 단체 편람』(민족문제연구소, 2010)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朴慶植, 『在日朝鮮人運動史: 8.15解放前』(三一書房,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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