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黑友会 |
---|---|
한자 | 黑友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2년 10월 |
---|---|
해체 시기/일시 | 1923년 8월 |
개칭 시기/일시 | 1922년 12월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4년 9월 |
최초 설립지 | 일본 도쿄도 |
원어 항목명 | 黑友会 |
1922년 일본 도쿄도에서 결성된 최초의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 단체.
1922년 가을 흑도회 내에서 사상 분화가 뚜렷해짐에 따라 박열(朴烈)·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정태성(鄭泰成)·홍진유(洪鎭裕) 등 아나키스트들의 주도로 1922년 10월경 풍뢰회(風雷會)을 조직했다. 12월 흑우회(黑友會)로 개칭하고 사무실을 홍진유의 집으로 옮겼다. 회원 수는 8명 정도로 출발했으나, 1923년 20여 명에 이르렀다.
흑우회는 1923년 8월 해체되었다가 1924년 9월경 재건되었다. 1926년 11월 흑색전선연맹(黑色戰線聯盟)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흑우회는 결성 이후 주로 언론 출판을 통한 항일 사상 선전과 일본 및 한인 단체와의 연대 활동 등 공개적인 활동에 주력했다. 먼저 1922년 11월 월간 잡지 『후데이센징(ふていせんじん)』[불령선인(不逞鮮人)] 1호와 2호를 발행했다. 이어 1923년 3월 서울 흑로회(黑勞會)의 이윤희(李允熙)·이필현(李弼鉉)과 함께 『현사회(現社會)』로 개칭해 3호와 4호를 발간하였다. 1923년 5월에는 신영우(申榮雨)·서동성(徐東成) 등으로 진용을 갖추어 『민중운동(民衆運動)』을 발행했다. 기관지 내용은 주로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과 아나키즘 선전 등이었다. 흑우회는 도쿄에서 열린 세계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고 조선 문제 강연회를 개최하며 국내의 노동 단체와 연대 활동을 펼쳤다.
흑우회는 박열이 1923년 10월로 예정된 황태자의 결혼식장에서 폭탄을 투척할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다가 김중한(金重漢)과 갈등을 빚으면서 1923년 8월 해체되었다. 하지만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조선인 대학살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일제 당국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을 ‘대역 사건’으로 구속기소하였다. 사건 이후 흑우회는 1924년 9월경 재건되어 민족적 연대 사업을 전개했다. 재건된 흑우회는 기관지 『흑우(黑友)』와 『자유사회(自由社會)』를 발간하고 노동단체를 규합하는 데 주력하였다.